2010년 7월 31일 토요일

[도서] 부처를 쏴라



종교의 궁극의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참 나를 발견하여 현생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리라. 숭산 대선사의 가르침을 그의 제자 현각스님이 엮은 이 책에서는 항상 바로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 즉 생각 이전의 원점에 머물라는 점을 강조한다.

나라는 존재도 나를 인식함으로써 존재하게 되는 것이므로 그 나라는 생각조차 떨쳐 버림으로써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깨닫고자 하는 그 마음조차도 눈(眼)이 눈(眼)을 보려는 것과 같아(38쪽) 길을 잘못 들게 하는 요인이 되므로 ‘오직 할 뿐’(正念, 14, 62쪽)임을 강조하고 있다.

아무런 생각없이 정진하되, 완전히 고요한 적정(寂靜), 즉 부동심(不動心)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생각을 끊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이란 이름으로 ‘마음’을 어지럽히는 존재들을 제거하는 방법으로써 아마도 부처를 만나면 그 부처까지도 쏘아서 없애버리라고 하지 않았나 싶다.

주위를 살펴보면 이 세상에 진리가 아닌 것은 없고, 모든 진리들은 생각의 여지없이 찰나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마치 물 위를 걷는 사람처럼 물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서는 그 보다 빨리 걸어야 하는 또 하나의 진리를 강조하시는 셈인가.

“순간을 유지하면 당신과 신은 결코 분리되지 않아요”(68쪽)

하나의 우주가 음양의 질서로 교차하고, 하나의 국가가 보수와 진보의 가치로 어지럽고, 한 사람이 자신을 지키려는 마음(着)과 벗어나려는 마음(脫)이 싸우고 있는 것은 고통스런 현실의 삶의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한 생각을 내려 놓음(放下着)으로써 평화를 구할 수 있다고 한다. 생각 때문에 싸우고, 개념 때문에 싸우는 것은 결코 평화가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른다면 생각도 없어질 것이므로 싸울 일도 없어질 것인가.

마음의 공부란 마음의 방향을 정하는 연습을 하는 일일 것이다. 그 마음의 방향을 정하는 연습을 전생에서 잘 해 온 사람은 이생에서의 삶은 물 위를 걷듯이 비교적 순탄하겠지만, 그 연습을 게을리 한 사람의 삶은 각종의 장애에 부닥치는 일들이 많을 것이리라.

그러나 아무리 마음의 연습을 많이 한다고 한들, 애초에 방향이 잘못되어 있다면 다시 업을 쌓는 일일 것이며, 내생에 다시 그 댓가를 치르게 되는 것이리라. 모든 결과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원인들이 있듯이 말이다.

아마도 지금의 생(生)은 지난 생(生)의 결과인 동시에 다음 생(生)의 원인이 될 지도 모르는 것이므로 우리는 지금 각자 예비・음모적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무엇을 예비하고 어떤 음모를 왜 하는가에 따라 참 나를 찾게 되는 결정적 실마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책을 많이 읽거나 머리를 많이 쓰는 사람이 종종 길을 잘못 찾는 이유는 집착하고 분별하려는 생각 때문(224쪽)이므로, 지식이 아닌 무엇이 본성(自性, 佛性)인지를 꿰뚫어 보려는 지혜가 더 필요할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게으르고 생각없이 사는 사람이 본성(自性, 佛性)에 가까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사람은 동물과 달리 끊임없이 생각에 시달릴 수 밖에 없는 존재이므로 그 생각이 몸을 뒤죽박죽으로 잘못 흔들지 못하게 마음의 방향을 항상 올바로 향하도록 끊임없는 수행이 필요한 것이리라. 

[도서] 마음을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사람의 일생은 사건의 연속이다. 그 사건은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게 마련이다. 그 원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따라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나타나는 결과로써 사람의 일생이 대부분 정해지는 것이리라.

1910년 최하옹 대선사를 은사로 하여 출가한 백성욱 선생님의 제자 김원수 교수님이 스승인 백 선생님의 생전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이 책은 결국 괴로움의 근원이면서 모든 망상의 뿌리인 마음을 찾아서 그 마음을 연습하여 모든 아상(我相)을 제거함으로써 몸을 바꾸기를 강조하고 있다.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이 모두 제 마음의 탓이니, 바로 그 마음을 들여다 보고 거기 무슨 그림이 그려져 있는지 알아 제 모습을 닦아야 할 것(43쪽)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아상(我相)이란 탐심(貪心)과 진심(嗔心)과 치심(痴心)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욕망과 분노, 무지를 깨치는 것이 몸을 바꾸는 첩경이라는 것이다.

마음을 연습하는 길은 생각없이 하는 것(29쪽), 익숙하지 못한 일에 익숙해지는 것(65쪽), 분별없이 마음을 쉬게 하는 것(79쪽)이라고 한다. 그럼으로써 얻어지는 지혜로써 육신에서 벗어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종소리가 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고, 바로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소리(80쪽)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라고 한다. 마음으로 살을 바꾸는 데는 천 일, 뼈를 바꾸는 데는 삼천 일, 뇌를 바꾸는 데는 구천 일(74쪽)이 걸릴 정도로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다.

탐심(貪心)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욕심내는 마음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알맞은 방법을 찾아나섬으로써, 진심(嗔心)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넓고 깊은 공경심을 키움으로써, 치심(痴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한없이 낮춤으로써 아상(我相)의 근원인 몸을 버릴 수 있다고 한다.

재가자(在家者)와 출가자(出家者)의 차이는 바로 그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그 마음이 세상을 향해 있으면 재가자(在家者)요, 그 마음이 부처님을 향해 있으면 출가자(出家者)라는 것(107쪽)이다. 부처님을 향한 마음이란 끊임없이 깨달음을 위해 마음을 연습하는 일일 것이리라.

부처님이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밝게 해주려고 애쓰는 사람(148쪽)은 모두 부처님이라고 하니, 지금까지 현생에서 중생들을 구제하려 했던 많은 성인들이 또한 다름아닌  부처일 것이다. 깨달음으로써 스스로 부처가 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스스로 깨달아 가는 그 마음의 연습이 중요한 것이지, 스스로 부처라고 하는 오만은 늘 경계할 일이다.

삼라만상이라는 것이 모두 마음의 그림자(156쪽)이므로, 그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해서는 가리지 않고 주는 연습을 하되, 가능하면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라고 한다. 갚을 능력이 있는 자에게는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자연스레 생기기 때문이라 한다.

죽은 사람의 기운은 물과 같고, 산 사람의 기운은 흙과 같다(133쪽)고 하니, 삶이란 흐르는 강물처럼 바다로 가는 그 길을 닮았다. 기운 빠진 흙을 실어서 바다로 쓸어가는 그 인연들이 다시 어떤 몸을 빌어서 세상을 새롭게 채우고 있는 것이리라.

몸을 버리는 일은 도마뱀을 따를 자가 있을까. 도마뱀의 꼬리처럼 뒤돌아 볼 일 없이 싹뚝 잘라 버려야 할 썩은 몸들을 어지러운 마음들이 가로막고 있다. 마음을 쉬게 하는 일은 어쩌면 일생을 걸려서도 성공하기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에 어느 깨달음처럼 순식간에 해치울 수도 있는 것이리라.



[도서] 스티브잡스이야기


지금 우리는 어느 면에서는 ‘스티브 잡스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열정으로 가득한 정력때문인지 호불호가 뚜렷이 나뉘고 있지만, 시대를 앞서가는 예측불허의 직관적인 상상력, 그리고 결정한 일을 밀어 붙이는 추진력과 대담성, 긍정의 에너지에 대해서는 부인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날마다 회사에 가면, 애플이든 픽사든 나는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과 일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입니다.”(230쪽)

과잉활동성향(hyperkinetic, 30쪽)이라고 까지 평가되는 일에 대한 그의 지나치기까지 한 열정은 “스피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69쪽)에 대한 그의 고민의 흔적이라든가 잠시도 정체하지 않은 삶의 역정들을 돌이켜 보면 그것이 아무리 강박증으로까지 폄하된다 하더라도 바로 가장 본질적인 사랑의 모습을 닮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은 여러분의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진정한 만족을 누리려면 당신이 가치있다고 믿는 일을 해야 하죠. 그리고 가치있는 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겁니다.”(297쪽)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을 놓치 않았던 그의 중독된 삶은 마치 죽음을 앞둔 시한부인생 못지 않은 간절함으로 살았지만, 주변의 사람들이 온전히 그 삶을 이해하기에는 적지 않은 온도차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삶(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을 낭비하지 마세요. 도그마, 즉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얽메이지 마세요.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미 마음과 직관은 여러분이 무엇을 진짜로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268쪽)

그의 행적과 언행들을 온전히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더라도, 그의 일과 그의 창조물들에 대한 자세는 단순히 하나의 기계로만 치부하는 산업적 생산물에 머물게 하지 않고, 같은 우주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생명체처럼 상상력으로 영혼을 불어넣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저는 스물 셋이란 나이에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물 넷에는 억만장자가 되었죠. 하지만 스물 다섯이 되었을 때에는 그런 것들이 전혀 중요하지 않더군요. 저는 돈을 위해서 일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230쪽)

췌장암의 선고를 받고, 다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게 됨으로써 다시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갖게 된 그는, 지금도 이 우주에 어떤 영향력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으며, 자신의 경험(사용자경험, 콘텐츠)을 나누는 일에 골몰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의를 표한다.

“아무도 죽음을 원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죽음에서 자유롭지 못하죠. 죽음은 삶이 고안해 낸 가장 훌륭한 발명품일지도 모릅니다.”(267쪽)

그리고 그의 삶을 여전히 관통하면서 흐르고 있는 일관된 철학과 실천들이 현재의 순간들을 연결하여 하나의 문화가 되고 있음을 분명히 목도하고 있다. 이 ‘스티브잡스의 시대’에 온전히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쉼없이 갈망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에게 꼭 필요한 덕목일 것이며, 현재는 어떤 방식으로든 미래와 연결되어 있을 것이므로 잠시도 머무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Stay Hungry. Stay Foolish"(303쪽)


2010년 7월 25일 일요일

[도서] 최인호의 인연


최인호의 인연 - 끝나지 않은 풍경


저자의 말처럼 인연이란 아마도 ‘신의 섭리’(머리말)라는 데 일단은 동의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밤하늘의 별처럼 만나고, 헤어지며 더불어 소멸해 가듯이 애초부터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절대자의 영역임이 분명해 보인다. 존재하고 있던 순간 나를 반짝이게 한 그 투명했던 빛들조차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의  삼라만상, 그 인연들로 비롯되고 마쳐지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또한 인연도 예외없이 마음을 따라 흐르는 강물과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흐름의 유형들은 마음으로 포용하면서 바다에 까지 이르는 인연이 있는 반면에, 마음으로 녹아들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기만 하는 개여울같은 인연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다만 짧은 인연과 만남일수록 다하지 못한 이야기와 미련은 더욱 긴 사연의 완성되지 않은 ’풍경’으로 남아 있을 것이리라.

비록 그 인연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같은 ‘끝의 공식'(17쪽)처럼 예정된 종말을 향하고 있다면, 종말의 이후를 경험해 보지 못하고, 준비도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이별이란 감당하기 힘든 굴레일 수도 있다. 이별이 있어 사랑이 존재한다는 언어의 유희를 어찌 간단하게 수용하고만 있을 수 있을 것인가.

또 저자의 말처럼 인연이란 ’지금 시간의 강을 건너며 어깨에 지고 있는 사람들의 무게'(52쪽)일지도 모른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된 어머니의 뒤늦은 화장하는 모습을 보며, 자식된 도리로서 그 누군가에게 무엇도 되어주지 못한 회한의 중압감은 어느 누구도 쉽게 떨치기 힘들 것이리라.

아무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길’(127쪽)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을 설득시키는 일은 일생을 통하여 가장 버거운 일이라는 정도는 알만할 것 같다. 그러나 ‘죽음은 너무나 당황스런 떠남이지만, 오래 기다린 죽음은 그제야 출발하게 된 먼 여행과도 같을 것’(143쪽)이라는 기대로 마지막 정돈된 ‘풍경’을 만드는 일까지도 온전히 각자의 몫이리라.

‘향기와 꽃보다 그늘을 키우다가 가는 란’(153쪽)과 들판의 개구리, 참새, 나방(247쪽)들과
모과나무, 감나무, 대추나무(248쪽) 들이 한 줌의 흙 속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꽃이 피듯이, 인연이란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이라기 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정으로 존재하게 하는 삶의 관계들의 ‘풍경’일 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피부의 질감까지 기억하는 인연들은 오랫동안 모두 같은 병을 앓았을 것이며, 앓고 있으며, 또 앓을 것이다. ‘추억 속의 바보’(281쪽)가 생명의 은인이었던 것처럼,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게 또 그 병들을 극복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또 하나의 ‘풍경’으로 어떤 새로운 추억으로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풍경’들이 비록 장미로 가득하진 않을지라도 장미와 완두콩을 구별(312쪽)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저자의 머리말처럼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나도 모르게 희미해진 기억 속의 그 ‘돌담’(321쪽)처럼 먼저 창문을 열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일일 지도 모른다.

흔적의 시간과 관계의 공간들이 만들어 낸 기적, 그 ’인연'이라는 ’풍경'은 누군가의 붓으로 그려가는 각자의 그림(97쪽)일 것이지만, 반드시 그려진 모습 그대로 보여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더라도 흙이 기억하는 물과 바람에 대한 추억처럼 어느 순간에 사라지는 것도 아니리라.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하나로 담아내는 ‘풍경’ 속에서  긴 여운을 남기는 나의 인연의 기록들이 하나의 이미지로 선명하게 다가 온다. 마치 그것들이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 무수히 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지만, 이제서야 그 소리들을 처음으로 듣고 있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