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9일 일요일

[오페라] 돈 카를로 -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다.



살아서는 모든 마음이 고통이요

죽어서는 모든 마음이 안식이라


무덤에서까지 사라지지 않는 열정,

죽음의 어느 순간까지가 안식일까?


마음 가는 모든 곳이 길 아닌 것이 없고,

발걸음 내딛는 모든 곳이 머룰 곳 아닌 것 없는데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나를 에워싸고 있는 연(緣),

그 속에서 울고, 웃으며 무디어져야 할 각자의 몫


시간이 흐를수록 가슴을 옥죄는 무거움,

황금으로 둘러싼 명예와 권세와 권위들


자유를 향한 갈망이 높을수록

투쟁의 의지는 불타오르지만


나의 안식을 위해

너의 목숨을 버리고나니,


그것이 사랑임을 그제서야 알겠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 무엇이 우리를 갈라서게 하는가



무엇이 우리를 갈라서게 하는가



본질을 변하지 않게 하는 것들은 역시나 사랑이다.


한계적인 인간은 예외없이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고,

때로는 그 환경이 본질들을 달라지게 한다.


그 달라진 본질들로 인하여 우리는 간혹 사랑조차 왜곡해버리기 일쑤다.

그러나 본질이 달라지는 것들은 애당초 사랑이라 불리워져서는 안될 것이리라.


형 진태의 동생 진석에 대한 사랑,


어찌보면 맹목적이고 저돌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나는 거기서 사랑의 본질을 본다.


사랑은 그렇게 사상과 이념을 뛰어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초월하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본질들이 아니리라.


전쟁만큼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삶은 없으리라.

삶과 죽음이 동일선상에서 교차하는 그 극한 상황 속에서도 형은 동생을 가슴에 품고 있다.


어떤 총부리와 포탄도 위협이 되지 않고,

죽음조차 그 둘을 갈라서게 하지 못한다.


순간적이나마 그들을 돌아서게 한 것은 바로

이 어지러운 세상과 섣부른 관념과 오해들이다.


어찌보면 미치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제대로 서 있을 수 없는 이 미친 세상,

적당히 미치는 것이 당연한데도 똑바로 서 있는 사랑들이 있다.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이 영화 속에서 나는 그들을 본다.


형 진태가 동생 진석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비록 지식을 배우지 못했어도 진실은 제대로 배운 듯하다.

때로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병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머니와 연인과 그리고 그들을 엮고 있는 돌아가신 아버지,

어찌보면 요즘의 우리들이 잊어가고 있는 부분들은 아닌가.


달라지지 않는 본질들은 뿌리에서 나온다.

뿌리는 후천적인 것이 아니라 선천적인 것일 수도 있다.


보잘것 없는 뿌리나마 그리워할 수 있는 그나마의 제도와 환경에 감사하며,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속의 삶과 사랑이 그리워진다.


젊은 시대에 강압적인 제도의 구속과 그로부터 파생된 제한된 여건 속에서

본의와 상관없이 우리들의 본질들을 도둑 맞은 적이 있었다.


때로는 목숨을 걸고 투쟁하며 죽음으로 항변한 사람들도 있었고, 또 때로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스스로를 침묵과 냉소로 세월을 흘려버린 시간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잃어버린 본질들을 되찾을 때다.

깨어있으므로 본질적으로 다시 사랑할 때다.


영화 속의 진석과 진태,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그 진한 감동들처럼 다시 살아갈 때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들 하질 않던가.







[연극] 유리가면 - 안면(顔面)인가, 가면(假面)인가



안면(顔面)인가,가면(假面)인가




하나의 가면조차 버거운데,

천의 가면을 감당하기는 얼마나 벅찬 일일까.


그러나 사람마다 감당할 수 있는 무게는

각자의 모습과 몫들로 남는가보다.


특히 연기자로서의 천부적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천의 얼굴을 가지고서도 자신의 인생을 잘도 다듬어 간다.


물론 때로는 가면(假面)인지 안면(顔面)인지,

어느 것이 진실인지 혼돈 속에서 방황할 때도 있겠지만,


깨어지기 쉬운 유리가면들을 그들은 잘도 소화해낸다.


그냥 얻어진 삶이 아니라 깨어지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한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겠지만,

그러한 정성을 기울일 수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가면의 얼굴과 가면의 행동까지도


무엇보다 소중한 삶, 그 자체이었기 때문이리라.


하나의 안면과 가면조차 제대로 관리하기 힘든 삶,

각자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의 보잘 것 없음,


이중의 혼돈조차 헷갈리는 본질의 상실감.


가면을 벗어던지고자 노력은 하지만,

가면은 언제나 깨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다.


현실의 가면은 유리가면이 아닌

그보다는 질긴 그 무엇으로 만들어진 모양이다.








[연극] 라이어 - “진실 혹은 거짓”




“진실 혹은 거짓”



누구든 살아가면서 수많은 갈등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인디언 언어로 “내면의 갈등”은 “내안의 두 마리의 개를 키우는 것”으로 표현한다고 한다.

결국 “나”라는 자아는 내가 먹이를 많이 준 살찐 개가 겉으로 나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연극 “라이어”는 그러한 “내면의 갈등”을 도덕적 규범의 무거움을 소재로

아주 가벼우면서 유쾌하게 그려내고 있다.


연출자와 배우들의 능력이 관객과의 소통에 호흡을 잘 맞춘 결과가

3000회를 넘는 장기공연의 숨은 비결일 것이다.


또 어쩌면 그러한 거짓을 진실처럼, 아니면 진실을 거짓처럼 날려버리고 싶은

많은 공감대가 녹아있는 까닭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모든 진실은 세가지 단계를 거친다고 했다.


처음에는 조롱을 당하다가 그 다음에는 격렬한 저항을 받으면서

마지막에 가서야 명백한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실은 늘 외롭고 지루한 인내의 시간을 요하는 버거움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생각해보면 진실과는 반대로 거짓은 순간으로 다가오는 찰나적 안락이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의 목을 조이는 구속이 되었다가

결국은 감당할 수 없는 파탄의 지경에 내몰리는 것은 아닌가 싶다.


“라이어”는 그러한 거짓의 편안함이 결국 파탄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다가

그러한 거짓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서야 비로소 진실처럼 현실이 되어있는 사실을 깨닫고

어쩔수 없이 그러한 거짓을 받아들이게 되는 메시지를 무거움 속에서 아주 가볍게 전하고 있다.


“진실 혹은 거짓”,


언제나 그 두가지의 갈등 속에서

여전히 나는 존재하고 고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늘 두 마리의 개가 내 속에서 으르렁거리고 있다.





2009년 8월 7일 금요일

[습작] 가마우지



가마우지



가마우지처럼

살아있는 사람아


네 목에 걸린 그리움들,

정작에 삼켜보지도 못하고


평생을 누군가에게

생존으로서 살았구나


가마우지처럼

죽어있는 사람아


목을 풀어 놓아도 삼키지도

내뱉지도 못하는 운명,


목구멍에 걸린 죽음조차

낯설어 되돌아보니

또 한 겨울,


묶여진 시간만큼

익숙해진 강변,


조급하게 밀어넣어 채워 온

세월만큼 너는 나로 인해

굶주렸었구나


가마우지같은

나의 사람아



※ 민물가마우지

바다와 연결된 큰 강이나 하구 등지에서 볼 수 있는 민물 가마우지는 중국에서 어부들이 고기를 잡는데 이용하여 더욱 유명한 새다. 우리나라에서는 과거 내륙지역에서 번식했던 텃새였으나 지금은 대부분 겨울 철새이다.

2009년 8월 6일 목요일

[영화] 올드보이



사랑은 사선(死線)을 넘는다.


사랑을 잃은 사람에겐 일상이란 무의미하다.

그러한 일상조차 그리워하게 하는 것은 철저한 외로움인 듯,


오대수,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산다"고..

그러다 일생을 수습할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빠져든다.

한마디의 말이 또 한사람의 운명을 바꿔놓고,

그 한마디의 가벼움으로 전부를 잃어버린 한 사랑의 처절한 분노,

그 분노로 인하여 살아있었던 사람, 이우진


결국은 증오도 하나의 의미였다.

증오할 대상이 사라지면

삶은 그처럼 또 무의미해지는 것일지도 모르지..


아버지와 딸, 누나와 동생,

사랑은 사선(死線)을 넘나든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 경계와 구분이란 것들도

사랑 앞에선 걸림돌이 될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


도덕과 관념조차 살아있는 자들에게나 의미있는 것들이겠지만

살아있어도 이미 죽은 자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가.


혼돈속으로 부터의 탈출,


딸이 아빠에게 "아저씨"라고 불러 참, 다행이다.

그래 너는 내 딸이지만 결코 나를 "아버지"라 부르지마라.


이조차 비극이지만,

살아있는 자는 도덕과 관념 속에서 그나마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미 죽은 몸으로 살아 온 자는 사랑을 찾아 미련없이 몸을 던지고,

살아있는 자들은 색깔을 달리하여, 또 사랑한다.


그렇게 살아간다.




[영화] 라스트사무라이




현재의 권력인 미국과 일본의 포장된 모습을 빼고,

순수한 예술로서의 작가의 의도를 좋게 해석하자면 역시


"정신"의 위대함이다.


그러한 "정신"조차 상품으로 잘 포장되어 정돈된 모습으로 진열할 때

또 시장을 장악하고 의식을 지배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게 없는, 힘의 논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자연스런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진정으로 그리워하는 것들은 과연 무엇일까.


보다 많은 재산과, 보다 높은 명예와, 보다 편리한 삶을 추구한 끝에 도달하게 되는 그 궁극의 점에서 과연 얼마만큼의 인간이 그나마 만족한 삶이었다며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을까.


우리들에게는 민족혼(魂)이 있고, 일본에게는 사무라이정신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지금 온전히 존재하지는 않는다.

깨어지고 넘어지며 상처받아 그나마 지금은 희미하게 퇴색되어버린 것들이다.

그만큼 멀리 사라져버렸기에 그 그리움으로 이 어려운 감동을 하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 감동만큼은 비록 짧은 순간일지언정 진실에 가까운 것이리라.

"삶"과 "죽음"만큼 인간이 애착을 갖고, 두려워하는 현상은 없으리라.


그러한 마지막 선택의 순간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일관되게 움직일 수 있는 그들의 정신, 그것도 본질은 감히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 자신의 삶의 방식과 사상을 절실히 사랑했기에 그들은 그들의 신념 앞에 삶을 포기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들이라고 왜 작은 행복 속에 안주하고 싶은 욕망이 없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안주(安住)가 아니라, 더 큰 치욕임을 미리 안 것이다.

그만큼 그들은 그들의 사랑에 철저했다.


"옛 것과 새 것이 이 칼 한자루로 하나가 되리라"는 그 말만을 남기고 죽음 속으로 주저없이 뛰어드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그들의 솔직한 용기가 바로 ‘본질에로의 귀의’일 것이다.

[연극] 에쿠우스


- 너, 살아서 재갈을 풀어라.



자신의 벽속에 갇힌 주인공 알런, 그리고 그를 치유하기 위한 의사 마틴, 또 주위의 사람들.누가 환자고 누가 의사인지 알 수가 없다.

환자를 보고 의사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의사를 보고 환자가 그 정상의 덧없음을 고발한다. 그렇게 정상과 비정상간의 공간은 없다.


각자 스스로의 재갈들만 있다.

누가 강요로 물린 것도 아니고, 모두 스스로 벗어던져야 할 각자의 몫들이다.


누군들 열정에 충실하고 싶지 않겠는가.

누군들 자유를 갈망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삶은 여러 가지 잣대로 의식들을 제약하고,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에 익숙해진다. 색깔있는 옷을 입되 좀 더 화려하고 싶고, 자신의 감정이 남들 앞에 드러내어지는 것에 쉽게 떳떳하기 어렵다.


알런의 연인, 질처럼..그렇게 가볍게는 움직이질 못한다.

어쩌면 그런 것들이 일반적으로는 정상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보이는 것들을 모두 숭배하면,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다고 했듯이

어느 것 하나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있는 것들은 우리 주위엔 드물다.


의사는 열정을 파괴할 수 있을 지언정 창조하지는 못한다는 마틴의 절규같은 고백처럼 쉽게 헤어 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오죽하면 자신의 신(神)이나 종교와도 같은 말의 눈을 찔러 그 앞을 못보게 했을까.

그러하지 않고서는 결코 우리는 그 굴레를 벗어던질 수 없기 때문이리라.


현실의 제도와 관념으로 판단한다면 알런은 정신병자와 다를 바 없겠지만,

그는 자신의 전부를 던져 그로부터 탈출하기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나 그에게 누릴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얼마일까.

영혼이 자유로운 것만으로 얼마만큼의 위안이 될까.


어머니가 광신도였던 것처럼, 의사 마틴이 자신으로부터의 노예였던 것처럼, 아버지가 그 아내로부터의 종속이었던 것처럼 누구에게나 한계들은 있다.


알런이 자신의 종교였던 말의 눈을 찔러 해방을 꿈꾼 것처럼,

각자는 살아서 재갈을 풀어야 한다.

어찌보면 그 재갈은 나와 무관한 것들인 듯하나,

따지고보면 스스로 채운 것들이요, 그 것을 풀 수 있는 사람도 정작 자신 뿐이다.


더 늦기 전에, 살아있는 동안 각자의 재갈을 풀자.

그리고 초원으로, 해변으로, 자유를 향해 달리자.


에쿠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