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헌법에세이(돌베게, 2009)
이 책의 제목이 ‘후불제민주주의’인 것은 저자가 머리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4쪽), 민주주의를 위한 비용을 아직 국민들이 충분히 지불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2부로 구성된 책의 내용은, 제1부에서 ‘권력의 당위’, 제2부에서는 ‘권력의 실재’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다. ‘당위로서의 헌법규범’과 ‘실재하는 헌법현실’ 사이의 갭에 관하여 저자의 경험과 인식을 바탕으로 한 고민들의 기록이자, 대안의 제시이다.
그러나 헌법이라는 것이 ‘국민의 활동과 국가의 작용에 대하여 합의한 동시대인의 공감하는 가치질서’이자, ‘시대정신을 시대적 처방으로 최고 규범화하는 것’이라고 정의해 본다면, 우리가 지불해야 할 남아있는 추가적인 비용이란 어떤 것들일까. 그것은 더 나은 미래가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는 다수 사람들의 ‘정의에 대한 참여의 의지’로 시작되며, ‘구체적인 실천’으로서 완결(17쪽)되는 것이리라.
당위로서의 규범과 실재로서의 헌법현실의 갭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합법적이고 정당한 절차에 의해서 진행되어 온 것인 한, 그것을 ‘부정의’한 것으로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 ‘서로 다른 차이의 존중’, 그 ‘다름의 인정’이 정의로운 길로 가는 첫 관문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권력의 실재, 즉 헌법현실은 어찌보면 더도 덜도 아닌, 꼭 그 만큼의 값을 치룬, 그 만큼의 댓가다.
저자는 현실을 ‘문화유전자’를 가진 인간이 맹복적 추종의 ‘진화적 본능’을 극복하지 못하고, 지성적 사유의 산물인 ‘당위로서의 헌법규범’에 ‘진화적 적응’을 하지 못한 상태(44쪽)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늘 당위를 현실보다는 앞세운다. 그러므로 공백은 불가피하며, 끊임없이 창조와 파괴를 되풀이 한다. 따라서 지금 당장의 문제는 아닐지라도 궁극적으로 그릇은 깨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민주주의에 대한 상식과 교양이 부족한 지도자보다 더 위험한 것은 ‘무책임한 주권자’(53쪽)라고 한다. 자유는 분명 책임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제도로서의 자유’는 처음부터 무한정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자유를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자유란 때때로 ‘도피의 대상’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은 ‘보호의 대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의 뜻은 그럴수록 점점 헤어날 수 없는 수렁으로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자 함일 것으로 판단된다.
헌법상 행복추구권은 여전히 건재하지만, 행복한 사람들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고,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음에도 개인의 표현의 자유들은 점점 위축되고 있으며, 검열의 폭은 확대(38쪽)되고 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옴(헌법 제1조 제2항)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민의 직접적 주권행사, 그 참여의 보장(직접민주주의요소의 확대도입 등)은 제한적이다.
그래서일까, 저자는 대한민국이 ‘아직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고 한다.(59쪽) 그러나 헌법적 정당성(민주적 정당성, 절차적 정당성, 개방적 정당성)을 완전히 상실한 채로 존재하는 헌법현실이 아니라면, 민주공화국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다만, 지금은 ‘이만큼’의 민주공화국일 뿐이다. 물론 저자도 자신의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하는 현실을 토로함이므로, 그 아쉬움의 크기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다양성에 대한 관용(71쪽)도 ‘존재로서의 당위’를 위해서 더욱 그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
진보와 보수는 그 자체로 선과 악인 것은 아니지만, 진보는 ‘당위’를 추구하고, 보수는 ‘존재’를 추종한다(68쪽)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합리적’인 진보와 보수라면 단순히 추구하고 추종하는 데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동반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분열로 망하는 진보’와 ‘부패로 망하는 보수’(69쪽)의 공존, 그것이 망하는 현실의 대부분의 실체인 만큼, 사전에 조화로운 동행의 방법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개인에게 경쟁은 불가피한 것(86쪽)이며, 민주공화국은 자유와 평등을 토대로 한 문명의 건축물(92쪽)이라고 한다. 그러나 국가가 자유와 평등을 ‘두 기둥’으로 존립하는 ‘하나의 건축물’이라면, 국가는 어느 하나를 전면적으로 배척하면서도 위태롭지 않은 듯 위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유와 평등은 분립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둥’으로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합리적으로 평등하지 않은 사회’는 이미 자유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유는 모든 형식의 동행’인 까닭이다.
저자는 ‘자유’를 강조하면서도 결코 ‘복지’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좋은 복지정책은 경제적 번영을 추동하며, 경제적 번영은 더 좋은 복지정책으로 가는 길을 여는 것(99쪽)이라고 하면서 둘 사이의 ‘양의 되먹임’(positive feedback)현상에 방점을 둔다. 서민들을 위한 ‘기초 소득의 보장’이 그들의 구매력을 높여 기업들에게는 ‘기본 이익률을 보장’함으로써 경제 성장의 동력이 될 수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더불어 국민연금법의 개정과 기초노령연금을 도입한 것은 전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업적(284쪽)임을 강조하고 있다.
‘법치주의’는 국민활동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을 구속하는 것(117쪽)이며, ‘표현의 자유’에 따르는 책임의 범위와 방식을 정하는 것도 권력자가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이어야 한다(127쪽)고 강조한다. 법률상 신분제도는 용인될 수 없지만, 경제학적•사회학적 의미의 계급은 여전히 존재한다(128쪽)면서, ‘선출되지 않은 시장권력’(129쪽)(특히 언론 등)에 대한 특수신분계급의 실재를 우려하고 있다.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어린이의 인권’(145쪽)을 존중하고, 학교교육에서의 ‘체벌금지’(148쪽)를 강조하고 있다. 지금은 ‘학교인권조례’가 교육자치단체별로 제정 논의 중에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규제’나 ‘자율’이냐의 어떤 결론보다는 그런 결과에 이르기까지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자발적 참여를 보장하는 절차적 제도를 공고히 하는 것이라고 본다. ‘맞을 짓’을 했을 경우에는 체벌을 가하되, ‘맞을 짓의 여부’판단과 ‘체벌의 정도’가 일방통행식이어서는 민주적이라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전면적인 집단적 소유는 반드시 전체주의로 귀결된다는 우려로 사유재산제도를 옹호(153쪽)하면서도, 재산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하고 있는 범위 내’에서만 향유할 수 있는 것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소홀히 한 측면이 있다. 영토와 통일조항의 모순(155쪽)에 대해 언급하면서, 증오와 불신을 존중과 이해로 바꾸고, 적대감과 분열이 있던 곳에 공존과 화합의 정신을 싹틔운(159쪽) 지난 정부의 업적을 너무 쉽게 봉쇄해 버린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모든 결정은 같은 절차에 따라 변경될 수 있어야 함(164쪽)에도 불구하고, ‘대의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장벽에 가려진 것들이 있다. 선출대상의 확대와 소환대상의 확대, 임기의 단기화, 선거제도의 조정, 전자투표활성화 등을 고려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184쪽)인 언론의 횡포와 관련하여 일정규모 이상의 언론에 대해서는 그 공적기능에 어울리는 투명하고 공정한 공적개입이 필요한 여지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자유란 ‘스스로 감당하되 남용하지 않을 만큼의 자유’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은 그 누구도 정파를 초월하지 못한다.”, “대통령은 정파의 지도자로서 국가를 운영한다.”(198쪽) 이것이 대한민국 정치의 현실, 즉 권력의 실재인지는 몰라도, 그것이 대의민주주의의 본질이라고 하기는 곤란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정당정치의 제도하에서 선출된 대통령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궁극적으로 ‘국민의 대통령’이어야 하지 않을까. 당위로서의 헌법규범은 대통령의 정파초월을 요구한다고 본다. 다만, 국민은 대통령을 왕처럼 생각해서도 안되고, 대통령은 왕처럼 행동(211쪽)해서도 안된다. 대통령은 대통령다워야 한다.
“영혼은 믿는 자에게만 보인다.”(261쪽)면서, 공무원은 영혼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불러 내지 못하는 대통령과 장관의 책임을 강조(262쪽)하고 있다. 또한 도서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아파트단지나 주택가에 작은 도서관을 만드는 사업을 기획했으나 결실을 맺지 못한 데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내고 있다.(296쪽) 오늘날의 정보화시대에도 새롭게 정보로부터의 소외계층이 나타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대책으로도 ‘작은 도서관 사업’은 정말 가치있는 일로 여겨진다. 사업계획승인대상 공동주택의 경우는 ‘작은 도서관’이 주민 복리시설 중의 하나로 되어 있다.
국민들이 가장 경계해야할 것 중의 하나로 ‘무지’(313쪽)를 들면서, 정당의 민주화를 강조(314쪽)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실패를 사과하면서 정당개혁운동가로서의 희망(319쪽)을 피력하고 있다. 보수정당의 이념적 옹졸함과 천박함, 진보정당의 이념적 편협함과 경직성을 아울러 비판함과 더불어 선거제도의 개편을 그 대안으로 제시(324쪽)하고 있다. 저자의 견해처럼 결선투표없는 대통령선거와 비례대표비율이 낮은 국회의원소선거구제가 상황을 더욱 비관적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비례대표비율의 제고나 중•대선거구제의 도입이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는 점에 공감한다.
저자는 자신이 설명하고 있는 그 ‘헌법애국주의자’(103쪽)이며, 고민하는 ‘자유주의자’(153쪽)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그러한 자신의 이념적 성향에 대해 저자는 ‘진보자유주의’ 또는 ‘사회자유주의’로 규정(236쪽)하고 있다. 그리고 참여정부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사회자유주의정권’(337쪽)으로 규정하고, ‘중도통합 또는 중도진보적 이념성향’(339쪽)을 내용으로 한다고 정의한다. 중요한 것은 ‘시대정신을 구체화하는 조화로운 처방과 소통’이며, ‘자유는 모든 형식의 동행’이라는 사실이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의 모의교도소실험의 결론인 악한 행동을 만드는 세가지 요소로서 사람, 상황, 그리고 시스템(368쪽)을 들고 있다. ‘썩은 사과상자’에 들어가면 ‘멀쩡한 사과’도 ‘썩은 사과’가 된다(368쪽)는 것이다. 시스템으로서의 상자를 바꾸는 일, 그것은 바로 ‘제도개혁’일 것이다. 시스템으로서의 ‘제도화된 악’(373쪽)의 개혁은 헌법개정까지 요구하지는 않더라도, 현행 헌법의 규정만으로도 충분히 개선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지불해야 할 비용이 아직도 남아있는 그 공간만큼의 여지들일 것이다.
현실은 끝없이 ‘학습기간’이라는 시간의 비용을 치를 수 밖에 없으며, 저자의 지적대로 지금은 오히려 ‘문명의 역주행’(110쪽)의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과속’과 ‘역주행’의 험로, ‘민주주의’라는 ‘끝없는 길’ 위에서 정산중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제도화되지 않은 ‘선의 연대’(374쪽)로서 ‘선을 제도화’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럴 때만이 명목과 장식으로서가 아니라 각자의 몸에 꼭 맞는 ‘맞춤 옷’처럼 편안한 헌법아래서 대중의 안식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헌법으로 인한 가슴설렘(33쪽)이 비단 저자만의 설레임이 아니라, 모두의 설레임일 때에는 다수의 인내는 이미 한계상황에 도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청춘의 설렘’이 그 ‘짧음’에서 오는 것이라면, ‘헌법의 설렘’은 아마도 ‘상실’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남아 있는 한, 여전히 희망은 있다. ‘희망사기’와 ‘희망고문’이라는 편견의 벽을 넘어서는 방법도 ‘구체적 실천’의 문을 통하는 것이리라.
헌법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사람사는 세상’이란 결국 ‘당위로서의 헌법규범’과 ‘실재하는 헌법현실’과의 갭, 그 최소화에 있는 길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