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28일 금요일

[도서] 후불제민주주의


유시민의 헌법에세이(돌베게, 2009)


이 책의 제목이 후불제민주주의인 것은 저자가 머리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4), 민주주의를 위한 비용을 아직 국민들이 충분히 지불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2부로 구성된 책의 내용은, 1부에서 권력의 당위’, 2부에서는 권력의 실재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다. ‘당위로서의 헌법규범실재하는 헌법현실사이의 갭에 관하여 저자의 경험과 인식을 바탕으로 한 고민들의 기록이자, 대안의 제시이다.
 
그러나 헌법이라는 것이 국민의 활동과 국가의 작용에 대하여 합의한 동시대인의 공감하는 가치질서이자, ‘시대정신을 시대적 처방으로 최고 규범화하는 것이라고 정의해 본다면, 우리가 지불해야 할 남아있는 추가적인 비용이란 어떤 것들일까. 그것은 더 나은 미래가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는 다수 사람들의 정의에 대한 참여의 의지로 시작되며, ‘구체적인 실천으로서 완결(17)되는 것이리라.
 
당위로서의 규범과 실재로서의 헌법현실의 갭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합법적이고 정당한 절차에 의해서 진행되어 온 것인 한, 그것을 부정의한 것으로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 ‘서로 다른 차이의 존중’, 다름의 인정이 정의로운 길로 가는 첫 관문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권력의 실재, 즉 헌법현실은 어찌보면 더도 덜도 아닌, 꼭 그 만큼의 값을 치룬, 그 만큼의 댓가다.
 
저자는 현실을 문화유전자를 가진 인간이 맹복적 추종의 진화적 본능을 극복하지 못하고, 지성적 사유의 산물인 당위로서의 헌법규범진화적 적응을 하지 못한 상태(44)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늘 당위를 현실보다는 앞세운다. 그러므로 공백은 불가피하며, 끊임없이 창조와 파괴를 되풀이 한다. 따라서 지금 당장의 문제는 아닐지라도 궁극적으로 그릇은 깨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민주주의에 대한 상식과 교양이 부족한 지도자보다 더 위험한 것은 무책임한 주권자’(53)라고 한다. 자유는 분명 책임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제도로서의 자유는 처음부터 무한정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자유를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자유란 때때로 도피의 대상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은 보호의 대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의 뜻은 그럴수록 점점 헤어날 수 없는 수렁으로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자 함일 것으로 판단된다.
 
헌법상 행복추구권은 여전히 건재하지만, 행복한 사람들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고,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음에도 개인의 표현의 자유들은 점점 위축되고 있으며, 검열의 폭은 확대(38)되고 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옴(헌법 제1조 제2)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민의 직접적 주권행사, 그 참여의 보장(직접민주주의요소의 확대도입 등)은 제한적이다.
 
그래서일까, 저자는 대한민국이 아직은민주공화국이 아니라고 한다.(59) 그러나 헌법적 정당성(민주적 정당성, 절차적 정당성, 개방적 정당성)을 완전히 상실한 채로 존재하는 헌법현실이 아니라면, 민주공화국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다만, 지금은 이만큼의 민주공화국일 뿐이다. 물론 저자도 자신의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하는 현실을 토로함이므로, 그 아쉬움의 크기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다양성에 대한 관용(71)존재로서의 당위를 위해서 더욱 그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
 
진보와 보수는 그 자체로 선과 악인 것은 아니지만, 진보는 당위를 추구하고, 보수는 존재를 추종한다(68)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합리적인 진보와 보수라면 단순히 추구하고 추종하는 데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동반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분열로 망하는 진보부패로 망하는 보수’(69)의 공존, 그것이 망하는 현실의 대부분의 실체인 만큼, 사전에 조화로운 동행의 방법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개인에게 경쟁은 불가피한 것(86)이며, 민주공화국은 자유와 평등을 토대로 한 문명의 건축물(92)이라고 한다. 그러나 국가가 자유와 평등을 두 기둥으로 존립하는 하나의 건축물이라면, 국가는 어느 하나를 전면적으로 배척하면서도 위태롭지 않은 듯 위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유와 평등은 분립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둥으로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합리적으로 평등하지 않은 사회는 이미 자유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유는 모든 형식의 동행인 까닭이다.
 
저자는 자유를 강조하면서도 결코 복지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좋은 복지정책은 경제적 번영을 추동하며, 경제적 번영은 더 좋은 복지정책으로 가는 길을 여는 것(99)이라고 하면서 둘 사이의 양의 되먹임’(positive feedback)현상에 방점을 둔다. 서민들을 위한 기초 소득의 보장이 그들의 구매력을 높여 기업들에게는 기본 이익률을 보장함으로써 경제 성장의 동력이 될 수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더불어 국민연금법의 개정과 기초노령연금을 도입한 것은 전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업적(284)임을 강조하고 있다.
 
법치주의는 국민활동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을 구속하는 것(117)이며, ‘표현의 자유에 따르는 책임의 범위와 방식을 정하는 것도 권력자가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이어야 한다(127)고 강조한다. 법률상 신분제도는 용인될 수 없지만, 경제학적사회학적 의미의 계급은 여전히 존재한다(128)면서, ‘선출되지 않은 시장권력’(129)(특히 언론 등)에 대한 특수신분계급의 실재를 우려하고 있다.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어린이의 인권’(145)을 존중하고, 학교교육에서의 체벌금지’(148)를 강조하고 있다. 지금은 학교인권조례가 교육자치단체별로 제정 논의 중에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규제자율이냐의 어떤 결론보다는 그런 결과에 이르기까지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자발적 참여를 보장하는 절차적 제도를 공고히 하는 것이라고 본다. ‘맞을 짓을 했을 경우에는 체벌을 가하되, ‘맞을 짓의 여부판단과 체벌의 정도가 일방통행식이어서는 민주적이라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전면적인 집단적 소유는 반드시 전체주의로 귀결된다는 우려로 사유재산제도를 옹호(153)하면서도, 재산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하고 있는 범위 내에서만 향유할 수 있는 것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소홀히 한 측면이 있다. 영토와 통일조항의 모순(155)에 대해 언급하면서, 증오와 불신을 존중과 이해로 바꾸고, 적대감과 분열이 있던 곳에 공존과 화합의 정신을 싹틔운(159) 지난 정부의 업적을 너무 쉽게 봉쇄해 버린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모든 결정은 같은 절차에 따라 변경될 수 있어야 함(164)에도 불구하고, ‘대의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장벽에 가려진 것들이 있다. 선출대상의 확대와 소환대상의 확대, 임기의 단기화, 선거제도의 조정, 전자투표활성화 등을 고려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184)인 언론의 횡포와 관련하여 일정규모 이상의 언론에 대해서는 그 공적기능에 어울리는 투명하고 공정한 공적개입이 필요한 여지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자유란 스스로 감당하되 남용하지 않을 만큼의 자유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은 그 누구도 정파를 초월하지 못한다.”, “대통령은 정파의 지도자로서 국가를 운영한다.”(198) 이것이 대한민국 정치의 현실, 즉 권력의 실재인지는 몰라도, 그것이 대의민주주의의 본질이라고 하기는 곤란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정당정치의 제도하에서 선출된 대통령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궁극적으로 국민의 대통령이어야 하지 않을까. 당위로서의 헌법규범은 대통령의 정파초월을 요구한다고 본다. 다만, 국민은 대통령을 왕처럼 생각해서도 안되고, 대통령은 왕처럼 행동(211)해서도 안된다. 대통령은 대통령다워야 한다.
 
영혼은 믿는 자에게만 보인다.”(261)면서, 공무원은 영혼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불러 내지 못하는 대통령과 장관의 책임을 강조(262)하고 있다. 또한 도서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아파트단지나 주택가에 작은 도서관을 만드는 사업을 기획했으나 결실을 맺지 못한 데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내고 있다.(296) 오늘날의 정보화시대에도 새롭게 정보로부터의 소외계층이 나타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대책으로도 작은 도서관 사업은 정말 가치있는 일로 여겨진다. 사업계획승인대상 공동주택의 경우는 작은 도서관이 주민 복리시설 중의 하나로 되어 있다.
 
국민들이 가장 경계해야할 것 중의 하나로 무지’(313)를 들면서, 정당의 민주화를 강조(314)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실패를 사과하면서 정당개혁운동가로서의 희망(319)을 피력하고 있다. 보수정당의 이념적 옹졸함과 천박함, 진보정당의 이념적 편협함과 경직성을 아울러 비판함과 더불어 선거제도의 개편을 그 대안으로 제시(324)하고 있다. 저자의 견해처럼 결선투표없는 대통령선거와 비례대표비율이 낮은 국회의원소선거구제가 상황을 더욱 비관적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비례대표비율의 제고나 중대선거구제의 도입이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는 점에 공감한다.
 
저자는 자신이 설명하고 있는 그 헌법애국주의자’(103)이며, 고민하는 자유주의자’(153)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그러한 자신의 이념적 성향에 대해 저자는 진보자유주의또는 사회자유주의로 규정(236)하고 있다. 그리고 참여정부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사회자유주의정권’(337)으로 규정하고, ‘중도통합 또는 중도진보적 이념성향’(339)을 내용으로 한다고 정의한다. 중요한 것은 시대정신을 구체화하는 조화로운 처방과 소통이며, ‘자유는 모든 형식의 동행이라는 사실이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의 모의교도소실험의 결론인 악한 행동을 만드는 세가지 요소로서 사람, 상황, 그리고 시스템(368)을 들고 있다. ‘썩은 사과상자에 들어가면 멀쩡한 사과썩은 사과가 된다(368)는 것이다. 시스템으로서의 상자를 바꾸는 일, 그것은 바로 제도개혁일 것이다. 시스템으로서의 제도화된 악’(373)의 개혁은 헌법개정까지 요구하지는 않더라도, 현행 헌법의 규정만으로도 충분히 개선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지불해야 할 비용이 아직도 남아있는 그 공간만큼의 여지들일 것이다.
 
현실은 끝없이 학습기간이라는 시간의 비용을 치를 수 밖에 없으며, 저자의 지적대로 지금은 오히려 문명의 역주행’(110)의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과속역주행의 험로, ‘민주주의라는 끝없는 길위에서 정산중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제도화되지 않은 선의 연대’(374)로서 선을 제도화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럴 때만이 명목과 장식으로서가 아니라 각자의 몸에 꼭 맞는 맞춤 옷처럼 편안한 헌법아래서 대중의 안식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헌법으로 인한 가슴설렘(33)이 비단 저자만의 설레임이 아니라, 모두의 설레임일 때에는 다수의 인내는 이미 한계상황에 도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청춘의 설렘이 그 짧음에서 오는 것이라면, ‘헌법의 설렘은 아마도 상실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남아 있는 한, 여전히 희망은 있다. ‘희망사기희망고문이라는 편견의 벽을 넘어서는 방법도 구체적 실천의 문을 통하는 것이리라.
 
헌법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사람사는 세상이란 결국 당위로서의 헌법규범실재하는 헌법현실과의 갭, 그 최소화에 있는 길일지도 모르겠다.
 

2011년 10월 22일 토요일

[도서] 그 남자네 집



그 남자네 집(박완서, 현대문학)


여자의 일생, 그것이 어머니의 인생이든, 본인의 인생이든, 딸의 인생이든, 거기에는 분명 공통분모가 존재하는 것 같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어떤 해방에 대한 갈망인 듯 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우리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시절을 배경으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첫사랑인 그 사람의 흔적을 추적한다.
 
자신의 인생은 비록 그런 위기의 사회 속에서도 비교적 평탄하게, 어찌보면 손쉽고도 대개의 사람들이 공감하는 합리적인(?) 선택을 하면서 살아온 듯 하다. 미군부대에서의 직장생활이라든가, 무능력한 첫사랑을 버리고 안정적인 은행원과의 결혼 등이 그 주된 증거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언제나 구슬같은 처녀이기를 원하는 일상 속의 여자였다.
 
고부간의 갈등이라는 것도, 주인공은 꽤나 심각하게 그 갑갑함을 호소하고 있는데,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리 충격적인 것은 아닌 듯 하다. 아마도 그 당시 대학물까지 먹은 자신의 입장에서는, 선택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마음에 흔쾌히 만족스럽지는 않은 어떤 불만의 강도에 비례하고 있는 듯 하다.
 
그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문화의 차이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문화가 아니라 한 문화가 다른 문화를 내 것보다 저급한 것으로 얕보고 동화는 물론 이해까지도 거부하는 태도 때문에 생겨나는 것”(153), “변화를 꿈꿀 수 없는 안정감이야말로 나에게는 족쇄였다.”(162)
 
신념이든, 취향이든, 취미든지 간에 인간은 누구나 일탈을 꿈꾼다. 그것의 근본적인 동인은 아마도 그것이 인간의 삶의 조건을 이루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주인공의 일탈은 이별과 결혼을 한 후, 우연한 첫사랑과의 재회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재회 이후 그 남자는 시력을 잃고, 그녀는 귀여움을 잃은 채로 첫사랑의 추억은 박살이 난다.(289) 결국 그것은 일탈이라고도 할 수 없는 어떤 막연한 불안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과거의 기억을 통해 다시 확인하는 것은 첫사랑의 아름다움이라기 보다는 현실의 당혹감일 때가 많은 것 같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영역 속에서 자의에 의하든, 타의에 의하든, 이미 세월에 실려 온 각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리라.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우리들의 시간이고,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벌레들의 시간이었을까.”하고 되묻는 독백 속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의 무게이다.
 
첫사랑은 복기가 아니라, 어찌보면 다시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으로써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부분 속에서 전체를 보는 눈을 뒤늦게 갖게 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처음부터 벌레들의 시간’(201)이나 벌레들의 짓’(223)은 없었으며, 그 전체가 각자들의 시간이었고, ‘각자들의 짓이었음을 아는 데까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일 뿐, 누구를, 무엇을 탓할 일은 아닐 것이다.
 
주인공처럼 아이를 넷이나 둔 엄마로서, 철저히 가정을 중시하는 책임감있는 남편을 둔 여자의 일생은 분명 행운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런 가부장의 가치’(248)를 존중하고, ‘믿음이 위안’(249)이 되는 그녀의 신념은 분명 보수적일 것이라는 것도 짐작이 간다. 또한, 그녀는 첫아이의 출산으로 뺏길 자신의 자유그 작은 것의 살려는 의지의 집요함’(242)에 섬뜩하기도, 측은하기도 한 그런 이기적인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주인공에게서 찾은 그 남자의 집은 마지막 포옹처럼 담담하게 완벽했던 결별이었고, 오히려 양공주로 살았던 춘희의 그리움이 어찌보면 그 남자의 집의 본래의 모습이 아니었겠는가 싶다. 그녀의 마지막 안부전화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듯이 말이다. “아무것도 안 그리워하면 무슨 재미로 살겠수.”(306) 사람들에게는 그리워할 대상의 존재가 삶의 필요조건인지도 모르겠다.
 
진정한 행복이란 순간순간 나타났다 사리지는 오색찬란한 무지개가 아니라, 지울 수 없는 기억 속 갈망들의 확인이 아닐까 싶다.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엔 그 뚜렷한 확인을 위한 자신들의 기억 속의 희미한 들이 있다.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곳으로부터 다시금 되돌아 서 보길 원하는 자신들을 위한 집이다.
 
집들로 부터의 해방은 언제쯤 가능한 것일까.


2011년 10월 21일 금요일

[도서] 숨은 조화



숨은 조화(문광훈, 아트북스)


세상의 악의에 맞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크게 없어 보인다. 그러나 내게는 빗장이 있다.”(표지 뒷면) 이 책의 표지에서 저자가 독자에게 심미적 동행을 권하면서 하고 있는 말이다. 세상을 선의와 악의로 구분할 수 있다면-아마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선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악의에 맞서는 방법이 최소한 빗장걸기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빗장이란 어찌보면 감당할 수 없는 자유와 두려움으로부터의 무책임한 도피수단으로 이용될 우려가 있다. 까뮈의 말처럼 예술가는 괴로움과 아름다움에 동시에 봉사해야 한다.(예술가와 그의 시대) 마찬가지로 예술가는 선의와 악의에 동시에 맞서야 한다. 악의 없이는 선의도, 추함이 없이는 아름다움도, 괴로움이 없이는 행복이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도 아름다움이란 단순히 예쁘다거나 편안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추악성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아름다움이다.”(21), “폐허의 흔적을 지니지 않은 아름다움은 거짓이다.”(191)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편견도, 의미도 부여함이 없이 독자의 눈으로 예술가의 의지를 찾아내는 것, 그것이 갈등의 현상이든, 숨은 조화든, 있는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 그것이 심미적 개인의 몫이 아닐까 싶다. 현재의 조화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빗장을 풀어야 한다. 예외없이 숨겨둔 그 빗장의 용도는 아마도 빗장풀기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상호주관적이면서 동시에 객관적인 심미적경험(10)을 통해 저자는 다양한 예술의 재현형식들이 사회에 어떤 구속력(?)을 가진 공공재(11)로서 기능할 것을 희망하고 있는 듯 하다. 이것은 아마도 하나의 시대정신을 탄생시키기 위한 시대적 처방으로서의 심미적 경험쌓기를 강조하고자 함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개념상으로는 미적인 것이든, ‘심미적인 것이든, ‘공공재로서의 그것의 경험이란 아마도 소통과 공유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리라. 그런 각자의 내적 경험들의 소통과 공유’, 그것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또는 인간 이후의 인간들이 의지할 수 있는 동행으로서의 휴머니즘이 아닐까 싶다.
 
그런 측면에서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자신의 경험과 그 파장들은 하나의 파급으로서의 의미는 충분히 갖고 있다고 본다. 이미 그는 씨를 뿌리고 있으므로 수확과 그 이후는 전적으로 심미적 독자의 몫일 것이다. 그렇게 연결되어 있는 한, 각자의 삶들은 그 형식 여하를 불문하고, 또 하나의 예술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면서 보여지고, 느끼면서 느껴지는 존재’(31)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계로 난 통로’(29) 중 하나로서 듣기의 대상인 소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소리의 개별적 표현 가능성은 다른 소리의 가능성에 의해 보장되고 동시에 제한받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공동체 속에 거주하는 개인의 가능성과 크게 다를 바 없다.”(38) 공동체 속의 개인의 자유라는 것도 그 가능성의 보장만큼 관계 속에서 제한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리라. ‘관계속에서의 평형’(178), 그것이 정의의 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심미적 경험공감적 이해의 반성적 감수성을 연습하는 일’(74)로 가둬둘 필요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규범과 제도 속의 자유는 최소한의 보장에 그치고 있을지라도, ‘심미적 체험을 위한 자유는 최대한의 보장을 지향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공감하더라도 서로 연인아니라 으로 맺어진들 그리 상관없는 일일 것이다. 예술이란 그조차 자유로운 영역에 속한 것일 터이니, ‘반성이 아니라 반항이더라도 무방하리라.
 
2부 이하에서 서술하고 있는 저자의 고요한 심미적 경험의 파장에 동행함으로써 분명 하나의 문턱을 넘어선 세상, 그 확대된 어떤 지평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저자의 바램대로 희망과 절망의 경계에서 그 틈을 메우는 양식(115)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소음현실있어야할 것으로서의 고요현실’(119)임을 깨닫는 삶, 그 자체가 바로 예술로서의 삶이 아닐까 싶다.
 
그럼으로써 예술가들과 그 심미적 경험들을 전하는 저자의 힘을 빌어 스스로의 존재의 확장’(169)을 도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침내 예술가들의 그 은밀한 숨은 조화들을 찾아낼 때, 그것은 새로운 세상의 창조이며, 더불어 신의 탄생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럴 때만이 은 절대 타자로서의 영원성’(192) 속에 소외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 소멸되는 자신 속에서 새롭게 발견되고, 발견되어져야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의 염려대로 가장 두려워해야할 것은 미숙한 채로 굳어버리는 일’(232)이거나, ‘그냥 살아감’, 살아감의 위대함’(231)을 모르는 일일 것이다. 그것이 소박한 삶인가의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그냥 살아감의 용기를 실행하고, 각자의 길 위에서 흥얼거릴 가락’(237)을 찾는 것도 또한 온전히 심미적 독자의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