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11일 일요일

[습작] 흔적





흔적(痕跡)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남겨진 흔적은 없는지 뒤돌아보니,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봄 볕 한자락이
발걸음에 걸린 미련을 흔들고 있어

그제서야 당신이 나의 어제였고 오늘이고
기대하며 설레었던 내일이었음을 알겠네

빚처럼 무거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리려는데
어느새 내 등 뒤의 그림자로 새겨져

처음부터 이별할 수 없는 인연임을 알겠네

족적(足跡)은 햇살같이 더욱 선명한데
한치 앞도 가누기 힘든 검은 새벽,

이슬처럼 맺힌 바람들의
투명한 방향은

어디인지



                                             

[습작] 황사

  
황사(黃沙



참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지만 얼마만큼의 인내이었길래
뒤집힌 가슴들이 천지를 눈멀게 하는 것인지

이른 설레임에 섣부른 치장으로 들뜬 사람들,
분노에는 아랑곳없이 도심의 거리는 여전히 분주하네

한 겨울을 밀어내도 채 녹지않은 대지를 침범한 너는
예고없는 위력으로 산야(山野)의 봄까지 앗아가 버려

미리부터 창을 걸어두고 바람을 막아둔 탓에
소통없는 토지는 새싹을 틔우지 못하고

침묵의 봄은 깨어날 줄 모르네




[습작] 둘일 때가




둘일 때가




마지막 한 잎보다
두 잎이 더 서럽다

함께 떨어지지 못한 채 남게 될
네가 더 서럽다

마지막 막차보다
막차 전의 그 시각이 더 서럽다

그때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내가 더 서럽다

혼자일 때보다
둘일 때가 더 서럽다

소통하지 못하는 가슴으로 목구멍에 걸리는 매일,
오도 가도 못한 채 발목이 잡힌

우리들이 둘일 때가
더 서럽다






[습작] 주차금지구역



  
주차금지구역 




차선의 녹색 신호등, 직진을 알리는데
앞으로 나아가는 위태로운 보행자,

횡단보도 위의 붉은 시선을
태연히 외면하는 무모한 유턴들,

처음부터 각자의 길은 그 방향이 어긋나
서두르는 마음들이 서로를 멀어지게만 하고

한숨돌릴 틈조차 사치스런 조바심으로
 끊김없이 덧칠한 황색 실선들의 질주

주위는 온통 주차금지구역





[습작] 이별





이별(離別





헤어짐이 아닌 또 다른 약속

질곡(桎梏)에 빠진 상념들이 얼기설기
뒤늦은 진실을 드러내는 최후의 안식(安息),

얇은 기억들의 두꺼운 먼지를 털고 
설레임으로 채우는 기도(祈禱)의 시간

또 다른 만남을 기약하며 가쁜 새벽을 넘어서는
낯선 구도(求道)의 길





                                                      

[습작] 연




()


  

정작,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너인가, 나인가
정작, 네가 그리워하는 것은 나인가, 너인가

너와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나인가, 너인가, 우리인가

그리워한다는 것은 살아있는 이유

살아간다는 것은 네 속에서 나를 찾고,
내 속에서 너를 찾는 애타는 목마름의 대화

그리워하는 이유만으로 살아가는

맹목적 복종





[습작] 야행



야행(夜行




지하철 1호선역사의 내려진 철문사이로는
한낮의 수월했던 소통은 더 이상 없고

어두운 철길의 은밀한 밀회들만
밤의 배출처럼 서둘러 보도(步道)를 채우는데

붉은 신호등 너머 언제나 그 자리에
익숙한 시선(視線)하나 창문을 열까

새벽까지 밤의 길목에 멈추어 선
어느 야행(夜行)




[습작] 아버지의 꿈




아버지의 꿈



비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빈 낚싯대를 걷어내시고
바닷가 갯바위대신 철길 옆 포장마차에서

어느 외로움이 먹다 남은 잔 술을 시키신 뒤
고추장범벅으로 발버둥치는 꼼장어 토막을 바라보시다

들었던 잔을 다시 내려놓으시고 빈 낚시바늘을 
바다로 내던지시며 밀려오는 파도로 잔을 채우시는

아버지 

끼룩끼룩 갈매기떼, 바둥대는 그 날개짓으로 
깊은 한 숨을 한줌에 버무리시며

꼼지락 꼼지락 시름을 안주삼아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시고 뒤척이시는

아버지의 꿈





[습작] 아버지가 없는 바다



아버지가 없는 바다



그 바다에 당신이 없으면 바람이 그리울 것입니다

언제나 그 자리 우뚝 솟은 평바위 끝에서
당신의 키보다 더 긴 낚싯대를 드리우시고 먼 수평선너머로
깊은 한숨으로 토해내시던 그 바람이 그리울 것입니다

파도의 마음을 헤아리시려 새벽같이 서둘러 머언 해변으로
부딪히는 바람의 꼬리를 조바심으로 뒤따르시던 안타까움에 절여 소금기나는 그 바람이 몹시도 그리울 것입니다

그 바다에 당신이 없으면 손길이 그리울 것입니다

고기가 낚시바늘을 놀리는지 미끼가 고기떼들을 희롱하는지 아니면
시샘하는 파도를 사이에 두고 서로가 뒤엉켜 한바탕 춤판을 벌이는지 상관도 없이 술잔에 머물던 그 손길이 그리울 것입니다

햇살이 눈부시게 부서지는 날이면 더욱 또렷한 깊은 주름살,
부표에 걸린 낚싯줄이 흔들리는대로 흘려보내시며 욕심을 끊어내시던
그 무심한 손길이 몹시도 그리울 것입니다

당신이 없으면 그 바다에는
아마 그 바람도 없을 것입니다.







[습작] 심장사


  
심장사(心臟死)
 



꽃잎하나 떨어진다

하늘이 땅위로 서둘러 내려앉으며
식어가는 체온을 데워보지만

이미 너무 늦은 시간,

뇌사(腦死)상태의 봄은 깨어날 줄 모르고
피빛으로 맹세한 재회는

기약할 수 없는 박동으로 가늘게 뛰고 있어
그 날까지 그리움이 남아있을지 몰라

서둘러 하루를 접어버린 저녁,

꽃잎 떨어진 자리에 봄의 심장이
죽어가고 있다


                                                    

[습작] 설화



  설화(雪花)




바람의 나라에서 꽃이 되질 못해 여기까지 왔는가
계곡은 침묵하고 있지만 어떠한 음모도 없다

벌거벗은 채로 적나라하게 드러낸 치부,
진실처럼 순백으로 눈부시고

계곡의 끝에 쌓인 숨은 사연들,
무릎까지 차오르며 발목을 붙잡지만,

천지에 가득한 하얀 축복으로
이별의 끝처럼 관대하다

또 하나의 역사가 되어
잊지못할 이름,

설화(雪花



※ 강원도 평창의 겨울, 며칠 전에 내린 눈들이 무릎까지의 깊이로 쌓여 있다. 산과 나무들로 빼곡한 계곡에는 바람들이 추억의 사연들을 감추고 있고, 언덕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세상은 온통 하얀 눈꽃으로 축제다.




[습작] 새 한마리




새 한마리




새 한마리 방충망에 걸렸다

내 손에 갇힌 운명(運命)
두리번거리는 낯설음, 뜀박질하는 두려움

밖에서 안으로의 침범을 막기 위한 방책이
안에서 밖으로의 탈출을 방해한다

가슴으로 쌓은 것들은 모두
손 끝 하나로도 무너지는 것들,

견딜 만한 시간 후에는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순간으로나마 영원하기를 바랄 뿐이지

방충망에 걸려 허공에 맴도는 아쉬움,
그리움 하나로도 돌아갈 곳 있는 자는 행복하다

새 한마리 창공으로 보낸다





[습작] 철새




                           철새
 




가슴 속 깊은 그리움들을 훔쳐보다
깊숙한 바닥에 숨었던 기억들이 익숙해

몰래 들여다보다 화들짝 놀란 심장을
부둥켜 안고 달래며 돌아서는데

수많은 겨울들의 버거운 무게를 털어내며
둥지를 박찬 자리에 상처처럼 앉은 깃털 하나

바람보다 가벼운 기억들은
어느새 모두 새가 되어

용서할 수 없는 거리를 두고 어디로들 향하는지
저무는 석양에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면서

허겁지겁 또 한 세월들을
실어가고 있네




                                                       

[습작] 비상


비상(飛上



(),날다 

햇살로 날아오르는 가슴에도 눈물은 있어
네게 보이기 싫은 그 하나의 이유로 오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높이로 비상(飛上)을 하지
그 곳에서는 눈물도 햇살이 되거든

잦아들 즈음에 다시 내려와
네 머리위에서 웃음을 보여주마

어느 날

바람(), 지나간 자리에 깃털하나 날리거든
내가 네게 보내는 추억쯤으로 기억하렴

언젠가 다시 그리워지면
비 그친 대지의 그림자를 찾아봐

아마 나는 네 머리위에서
하늘을 만들고 있겠지

(), 날다

착륙하지 못하는 가슴으로
비상(飛上)하고 있겠지


2010년 4월 4일 일요일

[습작] 부활





부활
 

불면의 밤을 이어가는 자에겐
부활은 없다

꽃이 피고 또 지고 있다는 바람의 소식은
 
어둠의 끝자락 마지막 생사(生死)의 갈림 길,
힘에 부친 몸부림의 그 희미한 기억 속에서

잠들지 못하고 서 있는 자가 새벽에 전하는 안부

불면의 밤을 이어가는 살아 남은 자에겐
이미 죽은 자의 부활은 없고

죽어서도 산 자의 침묵이
독백같은 맹세처럼 서 있다

   





[습작] 누구던가




누구던가 





횡단보도 위의 붉은 신호등이 마음을 재촉하고
늘 질주하는 시간처럼 앞만 보고 내달리면서

어지러운 교차로 위에 선 일방통행 중인 사람들,

마지막 배웅의 등짝처럼 단호한 이별들을 하면서
지나간 봄처럼 다시 올 겨울 속으로 서두르는데
 
집으로 가지 않는 방향의 전철역의 입구에는
집으로 가는 열차의 꽁무니를 흔들리는 눈빛들,

 집에서 멀어지는 선로 위로 주저없이 떨어지고 마는데
긴 겨울처럼 강인하지 못하고 짧은 봄처럼 나약한 너는

누구던가









[습작] 봄비


  

봄비 




바람이 방심(放心)한 창문에 부딪히고 간 사이
그리움이 무심(無心)한 시간을 흔들고 간다

넓은 창 너머로 깜빡 하루를 작별하는 순간,
다행히도 뒤돌아서는 시간의 그림자를 본다

깨어있지 못하였으면 미처 이별하지 못하였을 그대로
또 하루의 기억을 잃어버릴뻔 했다

나를 때리고 간 네가 고맙다





[습작] 해산

  


해산(解産)



겨울의 진통을 뒤로 하고
우면산(牛眠山)의 나무들이 요동을 친다

살을 찢으며 고개를 내미는 저 감동(感動) 사이로
오페라하우스의 선율이 꽃비로 날리면서

대성사(大成寺) 뒷 산에
개나리가 피려한다








[습작] 박제




박제(剝製



한 때는 세상을 가소롭게 주유(週遊)하기도 했었지
불타는 태양 속으로 거침없이 꿈을 실어 나르다

또 한 때는 검은 숯이 될 뻔도 했었지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 박물관 구석에서
이방인처럼 침묵하고 있는 싸늘한 시선,

자태는 여전히 의기양양하지만
감출 수 없는 눈빛은 이젠 숨겨진 마음이 되어

고백할 수 없는 사랑처럼 슬프구나

도리질 당한 가슴은 고독한 포르말린으로 채워져
다가갈 곳도, 다가갈 수도 없는 유리벽 속에서

재회할 수 없는 이별처럼 서럽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