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 살아서 재갈을 풀어라.
자신의 벽속에 갇힌 주인공 알런, 그리고 그를 치유하기 위한 의사 마틴, 또 주위의 사람들.누가 환자고 누가 의사인지 알 수가 없다.
환자를 보고 의사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의사를 보고 환자가 그 정상의 덧없음을 고발한다. 그렇게 정상과 비정상간의 공간은 없다.
각자 스스로의 재갈들만 있다.
누가 강요로 물린 것도 아니고, 모두 스스로 벗어던져야 할 각자의 몫들이다.
누군들 열정에 충실하고 싶지 않겠는가.
누군들 자유를 갈망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삶은 여러 가지 잣대로 의식들을 제약하고,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에 익숙해진다. 색깔있는 옷을 입되 좀 더 화려하고 싶고, 자신의 감정이 남들 앞에 드러내어지는 것에 쉽게 떳떳하기 어렵다.
알런의 연인, 질처럼..그렇게 가볍게는 움직이질 못한다.
어쩌면 그런 것들이 일반적으로는 정상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보이는 것들을 모두 숭배하면,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다고 했듯이
어느 것 하나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있는 것들은 우리 주위엔 드물다.
의사는 열정을 파괴할 수 있을 지언정 창조하지는 못한다는 마틴의 절규같은 고백처럼 쉽게 헤어 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오죽하면 자신의 신(神)이나 종교와도 같은 말의 눈을 찔러 그 앞을 못보게 했을까.
그러하지 않고서는 결코 우리는 그 굴레를 벗어던질 수 없기 때문이리라.
현실의 제도와 관념으로 판단한다면 알런은 정신병자와 다를 바 없겠지만,
그는 자신의 전부를 던져 그로부터 탈출하기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나 그에게 누릴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얼마일까.
영혼이 자유로운 것만으로 얼마만큼의 위안이 될까.
어머니가 광신도였던 것처럼, 의사 마틴이 자신으로부터의 노예였던 것처럼, 아버지가 그 아내로부터의 종속이었던 것처럼 누구에게나 한계들은 있다.
알런이 자신의 종교였던 말의 눈을 찔러 해방을 꿈꾼 것처럼,
각자는 살아서 재갈을 풀어야 한다.
어찌보면 그 재갈은 나와 무관한 것들인 듯하나,
따지고보면 스스로 채운 것들이요, 그 것을 풀 수 있는 사람도 정작 자신 뿐이다.
더 늦기 전에, 살아있는 동안 각자의 재갈을 풀자.
그리고 초원으로, 해변으로, 자유를 향해 달리자.
에쿠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