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11일 토요일

[도서] 젊은 날의 깨달음


젊은 날의 깨달음(혜민, 클리어마인드)
-하버드에서의 출가 그 후 10년


프롤로그(7쪽)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의 무게 중심은 ‘하버드’가 아니라 젊은 날의 ‘깨달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제를 단 출판사의 고뇌를 이해하기란 우리의 학력지상주의 사회현실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은 결론이다. 비록 하버드대 입학성공기나 아이비리그로 가기 위한 비법(?)들은 없지만, 그보다 더 향기롭고 가치있는 저자의 수행일기가 에세이 형식으로 조용한 울림으로 파고든다.

캘리포니아 주립대 버클리에서 종교학을 전공하고, 하버드 대학원에서 비교종교학 석사를 수학하던 중 출가를 해 승려가 된 저자는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박사공부 중 유학생활의 경험을 포함한 출가 후 10년 동안의 일상과 미 동북부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햄프셔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느낀 소회들을 간결하고 담백한 문체로 전하고 있다. 하버드를 통한 최고의 가르침은 친구 존의 보이지 않는 선행을 통한 것이었다는 고백과 함께...

19세기 독일의 저명한 종교학자 막스 뮐러의 “하나만 알고 있다는 것은 그 하나도 제대로 모르는 것”이라는 말을 인용(206쪽)하면서 폭넓은 사고와 경험을 통한 통찰능력을 강조하고 있으며, 더불어 “영어를 마스터 하는 것은 마치 도(道)를 닦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일본의 스즈키 순류의 말을 인용(20쪽)하면서 하나를 제대로 아는 길도 결코 순탄치 않음을 자신의 ‘경복궁 영어’ 경험을 통해 소개하면서 문화의 이해(19쪽)에 우선적인 방점을 두고 있다.

독종만이 살아 남는 전투적 사회의 현실을 안타까워 하면서,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꿈보다는 지금 당장 실현가능한 주변의 행복에 더 관심과 주의를 기울여 볼 것을 권하고 있다.(41쪽) 지금 이 순간 주변을 살피면서 조건없이 나누어 줄 때 행복이 바로 나와 같이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런 까닭일까. 저자가 자신의 무의식으로 직감적으로 알아 본 전생의 은인같은 어느 스님과의 만남이라는 인연(32쪽)은...

저자는 겉으로 화려한 장미꽃 같은 사람과 내적으로 굳건한 소나무 같은 사람을 구분하면서(44쪽), 3일을 넘기기 힘든 장미의 화려함보다는 사시사철 변하지 않고 넉넉한 그늘을 제공하는 소나무와 같은 사람이 좋다(47쪽)고 한다. 어찌보면 3일을 꽃피우기 위한 장미의 인욕의 시간과 사시사철 푸르기 위한 소나무의 지계가 어떤 차이를 가지는 것일까 의문이지만, 나 역시 겉으로 화려한 장미보다는 일관된 소나무에 가깝고 싶다는 분별이 있는 것 같아 조심스럽긴 하다.

법화경 비유품의 ‘불타는 아이들’을 거론하며(57쪽) 어른들의 치기어린 어리석음도 경계의 대상이라 하였으며, 이삿짐을 싸는 친구의 ‘트럭 속 10년 인생’과 함께 모든 것은 항상 변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진리를 전하고 있다. 시작이 좋은 인연보다는 끝이 좋은 인연이 참으로 좋은 인연이라 하면서 불교의 무시무종(無始無終)을 언급하며 늘 새로운 인연을 위한 아름다운 마무리의 중요성을 또한 강조하고 있다.(66쪽)

중국 유학시절 도난당한 자전거의 원인은 탐심을 자극한 자신에게 있다(72쪽)고 하면서 부실한 열쇠를 탓하지 말고 스스로를 돌아볼 것을 지적한다. 미국 교육의 경쟁력은 공정한 장학금 집행 등 배분적 정의에 비교적 충실하려는 제도와 토론중심과 사고력배양에 초점을 둔 내실있는 교육정책의 결과라고 하면서 다양성과 창의성을 중시하는 풍토를 부러워하고 있다.(110쪽~115쪽)

사랑이란 중생 본래의 성질인 본인 위주의 이기적 마음이 어떤 대상을 통해서 최소화되었을 때 겪게 되는 마음의 상태(125쪽)라고 정의하면서,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존경하는 마음을 더불어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134쪽)고 한다. 어쨌든 사랑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날 문득 손님과 같이 찾아오는 생의 가장 귀중한 선물(127쪽)이라고 아울러 전하고 있다. 사랑도 상대방을 위해 베푸는 마음이 앞서야 하는 지혜를 강조한 뜻이리라.

초등학교시절 어느 선생님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139쪽)을 키워주시고, 믿음과 희망을 가게 한 칭찬 한마디의 힘(141쪽)을 갖게 해주었음을 언급하면서,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소한 원인으로도 크게 작용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전하고 있다. 아울러 심리적으로 매우 민감한 버튼을 누를 때(push the button) 격렬한 반응의 원인은 집착이며, 그 집착의 근원은 공포라고 한다.(221쪽)

세상의 모든 물체는 일정한 진동수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공명의 원칙’을 강조하면서(231쪽), 때로는 형식이 내용을 채우고 완성하는데 보탬이 될 수도 있으며(237쪽), 미리 어떤 선입관을 갖고 일을 행할 때는 ‘아난다의 오류’(241쪽)와 같은 간격이 있을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 남과 나의 경계가 사라지고 다른 사람의 공덕이 나의 공덕이 되며, 남이 지은 공덕을 같이 기뻐할 수 있는 보현보살의 수희공덕의 원(242쪽)을 더불어 강조한다.

화엄경에 의하면 ‘회향’이란 “중생들에게 모든 공덕을 돌려 중생들에게 일어날 온갖 나쁜 일의 문을 모두 닫아 버리고 열반에 이르는 바른 길을 활짝 열어 보인다.”는 뜻(251쪽)이라고 하면서, 남을 돕겠다는 마음이 결국은 본인부터 돕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믿음을 강조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살피는 일은 자신을 살피는 일이며 결국 보살행이란 누구보다 자신을 구제하는 가장 빠른 길임을 거듭 강조하는 의미일 것이리라.

깨달음은 빠를수록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한 생각 깨쳤는가의 여부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지, 빠르고 늦는 것은 크게 상관없는 일일 것이리라. 개인적으로는 비록 더 이상 신체적 젊음을 이야기하기에는 늦은 입장이지만, 저자의 소중한 젊은 날의 깨달음의 기록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구도의 고뇌와 환희를 공유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늘 길 위에서 정신적 젊음으로 서 있다.




2010년 9월 9일 목요일

[도서] 스님, 불 들어갑니다.



스님, 불 들어갑니다.(임윤수, 불광출판사)


이 책은 재료공학상 상변태(相變態)에서부터 삶의 심변태(心變態)까지 관심의 폭을 넓힌 재료공학박사인 저자가 열일곱 분 선사들의 다비식을 직접 찾아 다니면서 현장의 풍경과 느낌을 섬세하게 전해주고 있는 글이다. 그 분들은 다름아닌 서암, 청화, 정대, 월하, 서옹, 지안, 정일, 석주, 숭산, 혜산, 법장, 만봉, 명안, 정찬, 현광, 정공, 원담 큰 스님 등 모두 한국 불교계에 큰 가르침을 남기신 위대한 스승 들이다.

일반적인 다비장의 이동 순서로는 죽은 사람의 저승길을 인도하는 인로왕번, 스님의 법호를 적은 명정, 보신, 법신, 화신의 삼신번, 동, 서, 남, 북, 중방의 오방번, 불교기, 무상계, 법성계, 오도송, 열반계, 만장, 향로, 영정, 위패, 법주/독경단, 법구, 방송차량, 문도, 선방 스님, 장의위원, 비구, 비구니, 신도의 순이지만, 사찰이나 문중의 전통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고 한다.

상여의 꾸밈이나 연화대의 모습도 각양각색이다. 아무런 꾸밈이 없는 알관 상여도 있고, 화려하게 장식된 꽃 상여도 있다. 연화대의 모습도 돌로 쌓은 석곽, 철로 만든 철궤, 새끼줄타래를 쌍아 만든 새끼줄 연화대, 생나무를 쌓아 만드는 생나무 연화대 등 다양하다고 전하고 있다. 연화대의 조성시기도 법구가 이운되기 전에 미리 만들기도 하고, 이운된 후에 만들어가기도 한다고 한다.

태어나 살아온 모습처럼 죽음의 모습도 그렇게 겉으론 다른 모양이다.  그러나 그 실상(實相)은 결국 태어난 본 고향,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되돌아 가는 것임에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아마도 ‘집짓는 자’들이 더 이상 집(業)을 짓지 않도록 하고, ‘불타는 집’을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려는 마지막 구제의 법문들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거화를 한 후 법구가 제대로 수습되는지를 살피지 않고 미리 돌아서서 등돌리며 제 갈 길을 재촉하는 속세의 매정함(204쪽 등)과 직접 목탁을 치며 염하는 스님의 모습은 갈수록 보기 힘들고 녹음테이프로만 들리는 가벼운 일부 승가의 세태(205쪽 등), 다비되다 남은 스님의 법구가 그대로 노출되는 절차의 미숙함(206쪽) 등에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

나아가 영결식을 포함해 다비 준비와 절차, 연화대를 만드는 방법이나 소요물 등을 세세히 기록한 교범서(manual)라도 만들어 기록으로 남기고 전해졌으면 하는 바램을 남기고 있다.(220쪽) 일부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숙하고 부족함이 있다면 그런 부족함조차도 있는 그대로의 법문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 본다. 애초에 법(法)이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들이 아니었던가.

책의 부록에는 큰 스님들이 남긴 오도송과 임종게를 정성스럽게 덧붙여 전하고 있다. 이미 호흡은 없어도 큰 스님들의 가르침들은 그림자의 그림자(83쪽)처럼 영원히 살아있음을 본다. 비록 그림자 없는 곳에서도 밝은 달은 그렇게 항상 떠 있다.(無一影處顯示行)(61쪽)

[도서] 참 좋은 인연입니다.



참 좋은 인연입니다.(백금남, 이른아침)


이 책은 저자가 41명이라는 대가족이 비슷한 시기에 연속적으로 출가, 수행한 일가의 이야기를 마지막 생존자였던 일타 대종사로부터 직접 듣고 기록한 내용을 사실대로 전하고 있다. 특히 일타 스님이 직접 설명을 위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가족승계보>(4쪽)를 따라, 4박 5일간의 해인사 말사인 지족암에서의 만남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일타 스님은 14세에 친가 및 외가의 식구 41명이 모두 출가하자 뒤를 이어 통도사의 고경스님을 찾아 출가하였으며, 26세 되던 1954년에 오대산 서대에서 혜암 스님과 함께 생식과 장좌불와로 하안거를 마친 뒤 엄지를 제외한 오른손 열 두마디를 연지연향(燃指燃香)했다고 한다. 두 차례에 걸쳐 경북 봉화에 있는 태백산 도솔암에서 안거정진 했으며, 1999년 법랍 58년, 세수 71세로 하와이 와불산 금강굴에서 열반에 드실 때까지 한국불교사에 큰 자취를 남기신 분이다.

연지연향(燃指燃香)한 오른손에서 살아 생전에 이미 생사리가 나와서 주위를 놀라게도 했지만(불교신문, 불기2543년 12월 7일자 3면), 무엇보다 이 책은 스님의 외증조 할머니 평등월 보살의 사후 이적으로 시작된 가족들의 승가와의 출가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명문 광산김씨 가문의 외증조부인 보운거사 김영인의 사후, 외증조모인 평등월보살은 독실한 불심으로 생전에도 이미 신통력을 발휘했으며, 사후에는 일주일간이나 방광을 보인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런 신통력과 이적을 직접 경험한 주위의 가족들은 하나 둘씩 출가를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고, 일타 스님에게 가장 직접적인 충격과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 어머니 상남(성호 스님)은 떠나기 전날 5일 장에서 아들의 운동화와 양복을 미리 준비하고는 당일 ‘주어진 대로 사는 길’과 ‘새로운 세상을 여는 길’의 두가지 길에 대해서 언급하며(171쪽) 자신의 길을 가겠노라며 당차게 당신의 길을 떠나고 만다.

부모와 자식, 특히 어린 아이의 손을 뿌리치는 어미의 심정은 부처가 아들 라훌라를 자신의 앞길에 장애라 이름하여 제쳐 놓고 출가하던 그 심정에 비유(173쪽)할 수 있을까마는, 나같이 어리석은 중생의 심정으로는 여전히 헤아리기 힘든 인연의 작용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단호한 결심과 행동이 아니면 인연의 고리를 끊을 수 없는 것이며, 육도윤회의 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단 말인가.

또한 이 책에서는 외삼촌 영천 스님을 통해서 ‘걸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부처님 자체가 걸사였으므로 승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걸사이며, 걸사란 ‘걸식을 일삼는 사람’이라고 설하고 있다.(227쪽) ‘거지’는 그냥 ‘음식만 축내고 육신의 배만 불리며 세월을 가는 사람’이지만, ‘걸사’는 ‘음식을 보시하는 이의 바램을 대신 실어 보내는 이로서 희망을 이루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228쪽)이라고 한다.

금오 스님이 만공 스님에게 “거지 짓도 아무나 하는 줄 아십니까? 중되는 복도 보통 복으로는 힘들지만 거지되는 복도 보통 복으로는 어림없습니다.”고 한 적도 있다(257쪽)고 전하고 있다. 깨달음이란 바로 낮은 곳으로 임하는 것(下心)임과 부처님이 걸식으로 중생구제를 위한 수행의 방편으로 삼은 이유를 알겠다. 그러고 보니 오늘날 우리나라의 승려 중 걸사를 행하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고, 오히려 불사는 날로 요란하지만, 엄살들은 여전한 것 같다.

어쨌든 통틀어 41명의 출가자를 배출한 인연이란 참으로 기이하다. 하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그런 인연으로 이미 삶이 시작된 것임에야 출가가 아니라면 달리 윤회의 고리를 벗어날 방도도 없었을 터이니, 최선의 선택이었을 수도 있으리라. 아마도 그들은 모두 해탈하였을 것이며, 영원한 열반에 들었을 것이리라. 그리하여 3대에 걸친 과보가 ‘하룻밤이 사라져버린 문 밖’(277쪽)처럼 분명 삼매의 행복이리라.

붙잡는다고 어디에 마음을 둘 것이며, 떠난다고 어디로 향할 것인가.
고해의 바다로 가는 길임을 알면서도 흐르는 강물처럼 매일 매일을 출가할 뿐.


[도서] 일기일회(一期一會)


일기일회(一期一會)(법정, 문학의 숲)


이 책은 2009년 봄 스님의 잦은 병환으로 쇠약해진 건강의 회복을 빌면서 스님의 제자 덕인, 덕현, 덕진 스님과 시인 류시화 님이 그동안의 법문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9쪽) 무소유의 ‘맑은 가난’을 강조하시며 몸소 모범을 보이신 법정(法頂)스님은 중생의 안타까움을 뒤로하고 2010년 3월 11일 오후 1시 52분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법랍 55세, 세수 78세로 입적하셨다.

일기일회(一期一會)는 ‘모든 순간은 생애 단 한번의 시간이며, 모든 만남은 생에 단 한번의 인연’을 뜻하는 말(49쪽)로서, 스님이 평소에 장소에 상관없이 일관되게 강조해 오시던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라는 말씀을 스님의 친필로써 표지를 꾸민 듯하다. “삶에서 가장 신비한 일은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 사실”(7쪽), “한 순간을 놓치지 말라. 그 순간이 생과 사의 갈림길이다.”(6쪽) “삶 자체가 되어 살아가는 곳, 그 곳이 바로 천국이다.”(15쪽)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어나기 때문에 봄을 이루는 것(17쪽)이듯이 현실의 삶이 그대로 하나의 삶의 의미를 이루는 것이라는 말씀일 것이다. 그리고 준비된 나무와 풀만이 때를 만나 꽃과 잎을 열어 보이듯이 우리들 자신은 지금 어떤 꽃을 피우고 있는지를 묻고 계신다.(18쪽) 개인들은 스스로 불성의 씨앗을 이미 갖고 있는 것이므로, 그 씨앗을 잘 보관하고 가꾸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또한 각자의 몫일 것이리라.

승가의 생명력은 청정성(21쪽)에 있음을 강조하시고, 늘 맑고 향기롭게 세상을 밝히기를 희구하셨다. 맑음은 개인의 청정과 진실을 말하는 것이고, 향기로움은 그 청정과 진실의 사회적인 영향력, 즉 메아리라고 하셨다.(21쪽) 더불어 절이 있기 전에 먼저 수행이 있었음을 말씀하신 것은 깨달음이 있은 뒤에 행이 있는 것으로 미룰 것이 아니라 바로 매일 매일의 수행의 삶 속에 깨달음이 씨앗처럼 깃들어 있으므로 바로 실행으로 옮김을 강조하신 것일 것이리라. 그 실행의 중심에 ‘맑은 가난’과 ‘자비의 나눔’(96쪽)이 있었다.

늘 우리는 과연 가진 것만큼 행복한가를 물으시면서(43쪽), 행복과 불행은 외부적인 상황이나 조건에만 있지 않고 내적인 수용, 즉 받아들이는 삶의 자세에 달려 있음(43쪽)을 강조하시고, 무지 속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안일과 방종을 경계하셨다. 아마도 자재(自在)하는 자유(自由)로움이란 늘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점검하고 참회하며 정진하는 엄격한 책임을 동반하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셨을 것이리라.

적당한 욕망이나 욕구는 삶의 탄력을 위해서 필요하지만, 지나친 탐욕은 인간을 병들게 한다(57쪽)고 하시면서, 생태계의 파괴와 교란행위, 금융경제의 위기 등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지금 당장의 과제임을 강조하신다. 수행자들이 밭을 갈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밭에 또 집착할까를 염려하기 때문(138쪽)이라는 초기 경전의 가르침을 예로 드시면서 묵혀두거나 쌓아두지 말며(178쪽), 그러한 비본질적인 것들로부터 먼저 자유로워지기를 원하시면서 간소하게 사는 것이 가장 본질적인 삶(197쪽)이라 하셨다.

부처님 오신날만 날인 것이 아니라 매일이 부처님 오시는 날이 되어야 한다(159쪽)고 하시며, 모두가 가지고 있는 깨달음의 씨앗에 꽃을 피울 것을 당부하셨다. 순간 순간 마음 쓰는 일이 곧 수행(163쪽)이므로 인간관계 속에서 그 대상을 찾아 늘 서 있는 자리(184쪽)에서 현재의 자기를 확인할 것(164쪽)을 주문하고 계신다.

한국불교에서 지혜를 우선시하고 자비를 소홀히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 지적하시면서, 지혜와 자비는 둘이 아니며 청정한 한 마음에서 나오는 같은 뿌리로서 오히려 자비심에서 지혜가 싺튼다(194쪽)고 하신다. 이는 스님께서 늘 말씀하시던 결과로서의 깨달음보다 바로 그 수행과정으로서의 실천이 더 가치로운 일임을 재삼 강조하시는 것이리라. 목표지점보다는 그 곳에 이르는 과정이 더 중요하며, 그 과정이 곧 우리들의 일상이자 순간순간의 삶이라고 하신다.(202쪽)

햇차가 나올 무렵이면 꾀꼬리가 돌아오고, 진달래가 필 무렵이면 반드시 소쩍새가 찾아오고(67쪽), 노란 좁쌀같은 마타리 꽃이 피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신선한 가을 바람이 불어 오듯이(213쪽), 세상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살아있는 모든 것은 한 뿌리에서 나누어진 가지(245쪽)이므로 사람사는 세상은 하나의 메아리라고 하셨다. 날마다 좋은 날이 되기 위해서는 그 속을 사는 우리들이 더불어 만들어 가야하는 또 하나의 과제임을 암시하신 것이리라.

인디언 영적 지도자인 ‘구르는 천둥’의 말처럼 대지가 자연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몸을 크게 뒤흔들듯이(246쪽), 사람도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이루려면 끊임없이 수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달라이라마의 말처럼 용서는 가장 큰 수행(261쪽)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는 ‘친절’이고, 친절은 자비의 구체적인 모습(271쪽)이라고 하셨다. 언제나 자비롭고 용서하며 너그러운 땅(262쪽)의 침묵을 배우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의 자유를 닮아 자기로부터 전체로의 중심이동을 권유하셨다.(361쪽)

그런 순간순간의 삶마다 우리는 늘 두 가지의 길, 즉 손을 내미는 마음과 외면하는 마음이 앞을 가로막는 선택의 시간에 마주서게 된다고 하시면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그 한 생각이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것이며, 다음의 생을 결정짓는 것이라고 하셨다. 지금 이 순간의 존재이유는 바로 지난 세월의 도움을 갚는 것(364쪽)이며, 그런 단 한번의 기회가 주어진 바로 지금 이 살아있는 순간을 늘 감사해야 해야하는 이유일 것이리라.

이젠 더 이상 예전처럼 중이 밥값은 해야 하고, 빚은 갚아야 하는 마음으로 서둘러 어두운 산길을 새벽처럼 달려오시던 법문은 없을지라도, 각자가 늘 깨어있기만 한다면 그동안의 가르침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맑고 향기로울 것이다. 스님은 그렇게 순간순간을 메마름으로 살아가는 모든 중생을 위해서 자신은 늘 가난했지만 또렷한 세상의 꽃으로 계셨기 때문이리라.


[도서] 산에는 꽃이 피네



산에는 꽃이 피네(법정 스님, 류시화 엮음, 문학의 숲)


법정 스님의 말씀을 류시화 시인이 많은 독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엮어 낸 책이다. 스님의 말씀을 진의 그대로 전달하지 못할까 나름대로 염려를 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보기에는 충실히 진의에 가깝게 소개하고 있으며, 감초처럼 곁들인 엮자의 세심한 의견과 관찰이 더욱 독자의 이해를 풍부하게 하고 있고, 더불어 깊은 사유를 돕고 있다는 느낌이다.

스님은 무엇보다 자신에게 엄격했던 분이었던 것 같다. 맑고 향기롭게 남긴 말씀들은 밥값을 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갚음이었다고 하시며, 자신에게는 늘 ‘맑은 가난’을 스스로 강조하시면서 절제된 삶의 아름다움을 지향하셨다. 수행자의 삶은 가난해야 하며, 주어진 가난이 아니라 선택된 가난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기본적인 조건(34쪽)이라고 늘 강조하셨다.

“이 세상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는 풍요롭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궁핍한 곳이다”라는 마하트마 간디의 말을 인용하시며,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가릴 줄 알아야 한다(37쪽)고 하셨다. 필요에 따라 살되, 욕망에 따라 살아서는 안된다(39쪽)고 하시면서,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37쪽)에 있다고 하신다.

욕심은 부릴 것이 아니라 버릴 것(42쪽)이며, 텅 비어야 새 것이 들어 찰 수 있다(42쪽)고 하신다. 텅 빈 곳에서의 허무가 아니라 그 충만감을 느낄 수 있으면 그 곳이 바로 극락이라는 것이다.(42쪽) 허공을 채우는 그것은 과연 무엇으로 충만한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홀가분하고 가볍지만, 맑고 향기로운 기쁨일 것이리라.

장애가 없으면 해탈이란 있을 수가 없다.(59쪽) 해탈이란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일 것이므로 당연히 부자유를 전제하는 것이리라. 장애는 몹시 불편하고 살아서는 완전하게 벗어날 수도 없을 것이지만, 보왕삼매론의 말씀처럼 세상살이에 곤란없기를 바라지 말고, 피하지 말며 숙제처럼 맞서서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58쪽) 어느 순간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의 본성은 본래부터 맑고 향기로운 것이므로 스스로 깨닫고, 자신의 씨앗을 북돋아 한송이 꽃으로 피워내야 한다(86쪽)고 강조하신다. 또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오직 현재일 뿐, 지금이 바로 그 때(200쪽)이므로 매 순간의 삶은 그냥 흘려버릴 것이 아니라 의미를 채우는 삶이 되어야 한다(86쪽)고 하신다. 그 하나의 의미가 바로 한 송이의 꽃일 것이리라. 그래서 이 세상을 꽃밭으로 만드는 중요한 요소일 것이리라.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80쪽)이라고 한다. 덜 가지고도 더 많이 존재할 수 있어야(64쪽) 하며, 적은 것으로써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少欲知足, 60쪽)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마도 필요에 의해 소유하는 것에 조차도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일 것이리라. 지금 필요한 것이라고 한들 얼마나 의미로서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태초에 말씀이 있기 이전에 침묵이 있었노라(91쪽)며, 침묵은 모든 삼라만상의 기본적인 존재양식(91쪽)이라 하신다. 생각이 떠오른다고 불쑥 말해버리면 안에서 여무는 것이 없을 것(94쪽)을 경계하심이다. 공덕은 시끄러운 소리로 쌓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써 아무도 모르게 쌓을 때 비로소 생각을 다스릴 수 있음을 강조하신 것이리라. 침묵하지 않으면 교활한 마음의 작동들을 어찌 다 살필 수 있을 것인가.

진정한 깨달음은 본래의 자기 마음 한 가운데 있는 꽃씨를 일상적인 행을 통해서 가꾸어 나가면서 시절인연이 되어 비로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110쪽)이라고 하신다. 순간순간 하루하루를 익혀가는 정진이 과거의 잘못 학습되어 저장된 습관들을 걷어내고 거듭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힘이라는 말씀일 것이리라. 오직 할 뿐인 것이다.

보이는 세계는 일시적인 것이며 항상 변하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가 영원하며 오히려 진리의 모습에 가깝다고 하신다. 그러므로 변화하는 세계가 있을 뿐, 근원적으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124쪽) 이미 죽은 사람들도 다른 이름으로 어디선가 존재하고 있을 것(124쪽)이므로 죽음조차도 마음이 지어낸 두려움, 즉 허상일 뿐이라는 것이리라.

순간순간 새롭게 피어나는 살아있는 사람(149쪽)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진리에 의지하여(150쪽) 순간순간 새롭게 피어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150쪽)고 하신다. 두려워할 것은 늙음이나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녹슨 삶’(150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의지와 상관없이 깃들인 습관을 바탕으로 또 새로운 습관을 들이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 것인가. 한 생각을 바꾸면 쉬운 일이라고도 하지만, 용기와 인내, 그리고 지혜가 무엇보다 필요한 일일 것이다.

카뮈의 말처럼 오직 사랑만이 우리의 존재를 증명해 줄 뿐이므로(156쪽) 스님은 산짐승을 위한 얼음구멍을 뚫는 일부터 시작해서 삼라만상에 대한 차별없는 애틋함을 가지고 그 사랑의 나눔에 지극한 정성을 들이신 듯 하다. 그래서 엮자는 ‘나눔이란 누군가에게 끝없는 관심을 기울이는 일’임을 스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156쪽)

꽃들이 저마다의 최선을 다해 피어날 뿐, 어느 꽃에도 비교되지 않는 것이지만(169쪽), 화려하고 초라함을 통해 시샘하고 갈등하는 것은 오직 인간의 마음작용일 뿐이니, 본성을 보는 깨달음을 강조하신다. 깨달음에 이르는 두 길은 바로 ‘명상의 길’과 ‘사랑의 실천’이며, 사랑의 실천은 ‘지혜의 길’과 ‘자비의 길’임을 밝히고 있다.(170쪽)

출가의 정신이란 비본질적인 것들을 거듭 거듭 버리고 떠나는 정신임(183쪽)을 강조하시고, 크게 버리지 않고서는 결코 크게 얻을 수 없음(182쪽)을 말씀하시면서 탐욕과 미움과 무지로부터 벗어나는 보편적인 출가의 정신을 설명하시고, 무명이 원죄(184쪽)라고 하신다. 그러나 스님의 출가 동기는 당신대로 살고 싶어서, 당신의 방식대로 살고 싶어서라고 밝히고 있다.(177쪽)

아마도 인간인 한 누구나 자신의 방식대로의 삶을 갈구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적인 조건과 상황이라는 울타리에 갇혀서 자신의 방식대신 가두리 속의 삶을 다람쥐 쳇바퀴처럼 살고 있다. 그 쳇바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달음질을 잠시 멈추어야 한다. 생존을 위해 고공크레인을 올라야 하는 현실의 삶 속에서 어쩌면 ‘멈춤’이란 꿈같은 사치일 수도 있을 것이리라.

그러나 지금 바로 새로운 마음을 내는 것이 어쩌면 가두리 양식장의 인드라망 그물을 끊어내는 일이며, 죽지 않고 살아서 다시 태어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 그물은 무수히 복잡해 보이지만 한 코만 해체해도 그물의 전부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절대 변할 수 없다는 무지로부터 깨어나서 믿음을 가지고 실천한다면 반드시 새로운 꽃을 피워낼 수 있을 것이리라.

그제서야 누군가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202쪽)라고 묻는다면 ‘나는 지금 여기에 있노라’라고 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010년 8월 26일 목요일

[도서] 현대심리학으로 풀어본 대승기신론




현대심리학으로 풀어본 대승기신론(서광스님, 불광출판사)


대승기신론은 마음의 본질과 작용, 깨달은 마음과 깨닫지 못한 마음에 대한 체계적 설명을 통해서 깨달음과 무지에 대해서 정의하고, 마음이 오염되는 과정과 정화하는 과정을 단계별로 설명하면서 구체적인 수행방법까지 제시함으로써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을 요약하여 전하고 있다.(4쪽) 저자는 원효스님의 소와 감산대사의 풀이를 참고해서 전통적인 분류체계를 따르지 않고 이해를 중심으로 전달하기 쉽게 해설하고 있다.(5쪽)

대승의 본질은 중생의 마음이며, 중생의 마음은 본래부터 깨달음의 상태에 있는 마음(眞如心)과 인연에 따라 생멸하는 마음(生滅心)의 두가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22쪽) 근본불교가 중생을 부처와 구별하여 이원적으로 보는데 대하여, 대승불교는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현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다.(23쪽) 따라서 근본불교에서는 중생의 최고경지가 부처보다 아래인 아라한의 경지이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중생이 곧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자신의 본 모습인 부처를 보고 자기가 원래 부처였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 수행의 길을 나선 중생을 보살이라고 부른다.(23쪽) 부처와 중생은 본질적인 깨달음의 수준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무지가 있고 없음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24쪽) 인식 대상을 통한 표상과 인식 주체의 심상이 모두 허상임을 알고 실상인 진여를 향한 마음의 때를 벗기는 것이 수행의 시작일 것이다. 깨달음은 바로 존재의 실상과 허상을 바로 보는 것이리라.

진여(眞如)란 심상과 표상의 허상을 제거하고 나면 텅 비어있기도 하지만(如實空), 그 비어진 공간을 번뇌가 없는 공덕으로 가득 채우게 되므로 또한 비어있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如實不空)(39쪽) 먼저 심상과 표상의 허상을 제거해야 그 자리에 자신과 타인을 이롭게 하는 무수한 선행을 행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眞空妙有)(40쪽) 비어있지 않다는 것은 참되고 변하지 않으며 오염되지 않은 깨끗함과 맑음으로 가득하다는 의미이다.(43쪽)

수행이전의 본래부터 깨달아 있는 마음(本覺)은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경험적 깨달음(始覺)과 상대적인 의미로 사용되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깨달음이다.(51쪽) 본래부터 모든 중생은 부처의 종자를 가지고 있음에도 무지로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므로 수행을 통해서 무지를 제거하고 나면 본래 깨달은 마음을 봄으로써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53쪽) 완전한 깨달음은 일체의 관념을 제거함으로써 무지로 가려진 본각이 완전하게 드러나고 작용하는 것이라고 한다.(62쪽)

파도가 없어지려면 바람이 멈추어야 하듯이 분노나 탐욕심이 없어지려면 무지의 작용이 멈추어야 하고, 사랑도 무지의 사랑이 아니라 지혜의 사랑으로 자비를 베푸는 것이어야 한다.(68쪽) 어리석은 사람의 성장과 깨달음을 위해서는 반드시 자비만 필요한 것은 아니며, 때로는 냉정함과 무시, 두려움도 아울러 필요하다고 한다.(74쪽) ‘인연따라 한다’는 말은 무관심하거나 내버려 두라는 말이 아니라 자기의 이익에 집착하지 말고 상대방에게 필요한 방법으로 마음을 내는 것이라고 한다.(74쪽)

환경과 조건의 차이를 본질적 차이로 이해하는 깨닫지 못한 무지를 넘어 마음 수행은 세세생생 쌓아온 감각, 정서, 생각, 관념, 심상, 표상 등 기억의 종자, 덩어리, 숙변을 제거하는 과정이어야 한다.(99쪽) 무지를 극복하고 깨달음을 위해서는 모두가 하나이고 한마음이라는 사실을 먼저 믿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한다.(108쪽) 더불어 수행을 위해서는 진여에 대한 믿음, 부처님의 공덕에 대한 믿음,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 수행자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고 한다.(203쪽)

깨달음의 문제는 지혜를 얼마나 성취했느냐가 아니라 무지를 얼마나 제거했느냐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한다.(141쪽) 무지의 정도, 즉 내면의 정신수준과 근기에 따라 외부로부터 오는 인연도 달라진다고 한다.(145쪽) 진여의 작용도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다양한 형태로 작용한다.(172쪽) 열반은 선물(177쪽)이고, 주객의 분별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가르침 자체에 매달려서 논쟁하거나 편견을 가져서도 안된다.(181쪽)

수행을 위해서는 움직이는 마음을 멈추는 수행(止, 禪)과, 움직이는 마음의 과정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수행(觀, 위빠사나)을 함께 병행해서 해야 한다고 한다.(225쪽) 그러나 마음의 과정을 살피지 않고 어떻게 마음을 멈출 수 있을 것이며, 마음을 멈추지 않고 어떻게 마음의 과정을 살필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위 두 가지의 수행방법이란 이름만 둘인 것이지 결국 하나를 이르는 것이리라.

흐르는 강물처럼 바다로 흐르는 인연을 따라 당도한 그 바다는 역시 업식(業識)의 바다이다. 그 깊은 심연의 아뢰야식과 표면에 가까운 마나식, 그리고 바람부는 대로 요동치는 요별경식 등으로 잠시도 조용할 날이 없다. 바다를 쉽게 비울 수는 없겠지만, 바다를 조용히 다스릴 수는 있으리라. 다스린 후에는 하늘로 올라 시절인연으로 다시 땅으로 떨어지는 눈과 비 등에는 좀 덜 오염되고, 정화된 업식으로 흐를 수 있는 것이리라. 그 윤회의 업을 단번에 끊어내기 위해서는 하늘과 땅과 강물과 바다, 그리고 바람이 모두 다름아닌 바로 나(我)라는 깨달음이 전제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존재를 따라 흐르는 인식으로의 긴 여정에서 나는 지금 어떤 파도를 타고 있는 것일까?



2010년 8월 20일 금요일

[도서] 현대심리학으로 풀어본 유식30송




현대심리학으로 풀어본 유식30송(서광스님, 불광출판사)


유식30송이란 마음이 발생하는 기원, 마음의 내용과 작용에 대한 탐구를 30개의 시적인 형태로 표현한 것으로서, 세친 또는 천친으로 번역되는 바수반두가 불교의 가르침 중에서 핵심만을 추려서 정리한 것(20쪽)이라고 한다. 불교를 마음에 관한 가르침이라고도 하고, 불교공부를 마음공부라고도 하므로, 유식은 이러한 마음에 대한 분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에 대한 분석이 필요한 이유는 생사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해탈함으로써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함일 것이다. 행복이란 나의 마음자리가 과거 어디에 있었으며, 현재 어디에 있으며, 앞으로 어디에 있을 것인가를 통찰함으로써 보다 높은 깨달음으로써 지혜를 쌓아 나와 나 아닌 것들과의 차별을 없애고 그들과 같은 눈높이로 자비롭게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는 것이리라. 불교의 가르침은 중도의 길이지만, 중도란 양 극단의 중간이 아니라 두 극단 속에서 서로를 보는 것이라고 한다.(115쪽)

전통적인 견해에서는 마음을 아뢰야식, 말나식, 요별경식의 세가지로 나누고, 아뢰야식은 의식에 영향을 미치지만 오감각식에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고 하며, 의식은 아뢰야식, 말나식, 오감각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있다(221쪽)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저장식, 생각식, 오감각식, 의식의 네가지로 나누고, 아뢰야식의 영향을 직접, 간접으로 받고 발생하는 말나식과 의식, 오감각식의 작용은 다시 아뢰야식의 종자로 되돌아 온다(221쪽)고 하여 상호 관계에 주목한다.

욕구, 결심, 기억, 집중 등의 특수한 정신작용이 오감각식에 작용하는가에 대하여도 전통적으로 긍정하는 호법(護法)의 견해와 부정하는 안혜(安慧)의 견해가 있고, 저자의 입장은 당연히 작용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말나식(생각식)에서 작용하는 특수한 정신작용과 의식에서 작용하는 특수한 정신작용은 차이가 있다(217쪽)고 한다. 또한 아뢰야식(저장식)을 바탕으로 발생하고, 말나식(생각식)의 영향을 받는 오감각식은 처음부터 오염되어 있다고 본다.(222쪽) 뿐만아니라 말나식(생각식)이 오감각식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따르더라도 아뢰야식을 근거로 발생하는 오감각식은 이미 오염되어 있다는 것이다.(223쪽)

유식30송은 처음 1송에서 25송까지는 깨달음의 내용과 목적을 설명하고 있고, 26송부터 30송까지는 깨달음에 도달하는 구체적인 방법과 단계를 설명하고 있다.(150쪽) 1송에서는 마음이 어떻게 마음 자체를 드러내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2송부터 16송까지는 드러난 마음을 세 차원으로 나누어 각각의 작용과 기능에 대해서 말한다.(90쪽) 17송과 18송에서 이를 다시 요약하고, 19송에서는 결과로서의 생사윤회를 강조한다.(91쪽) 특히 11송부터 14송까지는 의식의 정신요인들, 즉 선의 정신요인과 번뇌의 정신요인들로 가득하다.(159쪽)

20송은 말나식(생각식)이 계산하고 생각하는 작용으로 만들어 낸 모든 종류의 관념, 신념, 개념의 실체성을 부정(偏計所執性)하고,(101쪽) 21송은 인식의 주체와 대상은 서로를 의지해서 발생하므로 상대적(依他起性)이라고 하며, 이러한 의존적 성질과 계산하고 집착하는 성질이 제거되어야 있는 그대로의 모습(圓性實性)을 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108쪽)

22송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것이 때로는 독립적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상호 의존하기도 하므로 동시에 본질을 볼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112쪽) 23송에서는 20송부터 22송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체 현상의 본질적 속성(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이 사실은 고유하고 독립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119쪽)

말나식(생각식)의 고집과 주장이 의식으로 드러나는 것은 마음의 병이고, 오감각식의 작용으로 드러나는 것이 몸의 병이라고 한다.(122쪽) 고통의 원인이 인연(因緣)이라면 우선 ‘경험하는 주체로서의 나’인 인(因)과 ‘경험되어지는 대상으로서의 너’가 연(緣)으로써 조건지워지는 것임을 알고, 고통과 갈등의 일차적인 책임이 나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아는 것이 인연법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고통을 멈추는 일은 그 고통의 일차적 원인인 ‘나’를 바꾸면 되는 것이라고 한다.(93쪽, 94쪽, 95쪽) 사랑이 괴로운 이유는 집착하고 기대하고 요구하기 때문이다.(138쪽) 지혜로운 사랑, 즉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다.

마음이 힘들고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마음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마음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168쪽) 우울증은 지나치게 ‘나’에 집착해 있거나, 지나치게 ‘너’에 집착해 있다가 ‘나’를 상실해 버린 경우이므로,(185쪽)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삶의 고통과 원인을 아는 것이 시급하며,(181쪽) 마음수행은 집착하지 않기 위해서 또는 욕심을 버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의 결과 욕심이 사라지고 집착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한다.(186쪽)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불교는 나는 나와 나 아닌 모든 것의 조합이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나라고 한다. 그런 나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일단 ‘살아가는 나’와 ‘지켜보는 나’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아가는 나’는 ‘경험 전의 나’와 ‘경험하는 나’로 또 구분해 볼 수 있다. ‘경험 전의 나’를 지배하는 마음은 잠재의식인 아뢰야식(저장식)과 자아의식인 말나식(생각식)이며, ‘경험하는 나’를 지배하는 마음은 현재의식인 감각식(오감각식과 의식)이다.

아뢰야식은 내부에 있는 일체의 것을 대상으로 삼고, 말나식은 아뢰야식의 주체를 그 대상으로 삼으며, 감각식은 외부 현상인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함께 작용해서 일어난다고 한다. 오감각식의 작용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표상(表相)이라고 하며, 말나식의 작용만으로 드러나는 현상을 또한 심상(心相)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 즉 실상(實相)을 파악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실상을 구하고자 집착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상에 대한 집착마저도 내려 놓을 때 비로소 얻어진다고 한다.(120쪽)

있는 그대로의 실상(實相)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뿌리깊은 식(識)들을 지혜로 전환시켜야 하며, 그런 수행의 방법으로 5단계를 제시하고 있다. 이른바 5위로서 자량위(資量位), 가행위(加行爲),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九竟位)가 그것이다. 수행자의 자각은 아뢰야식을 꿰뚫는 깊은 통찰이어야 한다.(65쪽) 심상과 표상을 없애고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게 되는 무분별지(無分別智) 또는 직지(直知)의 단계를 넘어 일심(一心)으로 여여(如如)하게 될 때 비로소 윤회의 업을 끊고 제 자리에 우뚝 설 수 있는 것이리라.

능가경에서 결국 행위자는 없고, 행위만 있을 뿐(152쪽)이라고 했듯이, 비로소 그 분별없이 여여한 마음으로 또 하나의 나를 지켜볼 수 있는 정도의 마음 단계가 되어서야 내가 없어도 내가 있는 듯이, 내가 있어도 내가 없는 듯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그 자리가 아닐까 싶다. 파도가 일어도 바다는 변함이 없으며,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 잘나고, 못나고의 차이는 바람과 기압, 온도 등의 인연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파도의 크고 작음과도 같은 것이다.(127쪽) 바다에 닻을 내려서 일단 그 속을 자세히 살피는 것이 원만한 항해를 위한 최우선적인 일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