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에릭호퍼, 이민아 옮김, 궁리)
이 책은 모든 형식의 대중운동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참가자들(주로 맹신자들)의 일련의 심리적 특성을 다룬다. ‘좌절한 사람들’의 ‘자발적 참여’를 전제로 일정한 가설을 세우고, 이 책의 ‘현재’인 1951년을 기준으로 대중운동을 분석, 나름대로의 맹신자들의 심리를 설명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의 ‘좌절’은 임상학적 용어가 아니라 ‘인생을 낭비하거나 망쳤다고 느끼는 사람들’이라고 뒤의 주에서 밝히고 있다.(243쪽)
‘신을 믿지 않는 시대’에 그들이 만들어 내는 ‘신들의 세계’에 대한 설명이며, 덧붙여 몽테뉴의 말을 빌어, 단순히 자신의 견해에 불과할 뿐임을 거듭 강조함으로써 논의를 제안하는 것임(14쪽)을 밝히고 있다. 저자 ‘에릭 호퍼’는 이 책을 서술할 당시는 부두노동자로서 살았으며, 평생을 길 위의 노동자로 떠돌면서 남는 시간에 틈틈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연구한 사회철학자였다고 한다.
대중운동의 참여자들은 그 ‘운동’을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며, 그 방법으로 ‘종교화’ 기술-현실적 목표를 숭고한 대의로 바꿔놓는 기술-을 강조(20쪽)하면서, 변화를 향해 그들의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게 만드는 ‘갈망’의 본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주로 대중운동의 역동기-맹신자들이 형성하고 압도하는 단계-를 다룬다.(222쪽) 달리 말하자면 일종의 ‘위기사회이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주로 ‘충만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현 상태를 보존하고 싶어하지만, ‘좌절한 사람들’은 급진적인 변화를 선호한다고 한다.(21쪽) 그러나 ‘충만’과 ‘좌절’이라는 외적인 요소와는 상관없이 순수한 ‘의지’적인 요소만으로, 단순히 맹신하는 차원이 아니라 합리적 수준의 ‘희망을 신뢰’하는 ‘양호한’ 사람들은 여기서의 주된 논의의 관심사는 아닌 듯하다. 또한 ‘맹신자’니 ‘광신자’란 어떤 도덕적 가치판단을 전제로 하는 것 아니라, 단순히 사실적인 ‘믿음의 정도’를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빈곤층의 보수성’(23쪽), 경험은 변화의 ‘장애’가 되며, ‘경험자’들은 대개 늦게 개입한다(28쪽)는 등의 의견은 일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특히 ‘빈곤층의 보수성’으로 인하여 현대 사회의 양극화 현상이라는 것도 효율적인 기득권 유지를 위해 어쩌면 의욕적으로 ‘의도’된 결과이거나 최소한 고의적으로 ‘방치’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와 관련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역사라는 놀이는 흔히 중간자의 다수자들은 제쳐 놓고 최상위와 최하위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46쪽)
어찌보면 역사의 일반적 보편성이란 개별 특수성들의 사후평가 작업의 산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대중운동의 개별 참여자들과 그들의 맹신성조차도 되돌아 보면, 그들의 좌절에 대한 ‘상황적 분노’의 표현으로 일반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개개인의 삶의 측면에서 보면, 그들이 누구이든 상관없이 무엇보다 간절한 막다른 길 위의 ‘전부인 삶’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있었던 것인가? 위기의 사회는 그들을 얼마나 포용했을까?
그러나 상대적으로 최근에 우리 사회의 가난해진 ‘신빈곤층’(49쪽)의 확대는, 그들의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중산층의 기억’을 보상받지 못하는 한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대중운동에 적극적일 확률이 높다고 본다. 그와 관련하여서는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반항을 자극하는 것은 현실의 고통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의 경험이다.”(52쪽)
그는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재능이 없는 한, 자유란 따분하고 번거로운 부담이다.”(55쪽)라면서 ‘자유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책임에서 자유롭기 위해서’ 능력없는 사람들이 운동에 가담한다고 한다. 나아가 “인생을 허비하고 망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유보다 평등과 우애를 더 갈망한다.”고 하면서, 그들의 자유는 “평등과 획일성을 세우기 위한 자유일 뿐”(57쪽)이라고 폄훼하고 있다.
‘자유’의 역사 속에서 ‘자유로부터의 소외’를 위한 투쟁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를 쟁취한 다음에는 그 ‘자유로부터의 자유’를 찾고 있는 대중들의 불안한 심리를 발견하고 있다. 살아있는 대중은 늘 불안하다. 그 중 ‘좌절한 사람들’은 자유를 찾고 있었던 것이며, ’도피의 대상인 자유‘는 더 이상의 자유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에서 ‘자유’의 개념이란 획일성까지는 아니더라도 ‘합리적인 평등’ 정도는 아우를 수 있는 ‘부조리하지 않은 자유’이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대중이 갈망하는 자유는 자율적인 삶이라는 견딜 수 없는 부담으로부터의 자유”(206쪽)이므로 “대중운동이 사무치도록 좌절한 이를 치유하는 것은 절대 진리를 설파하거나 그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든 곤경이나 학대로부터 구제해줘서가 아니라, 쓸모없는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때문이다.”(67쪽)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소수일지라도 ‘순수한 의지적 측면’을 지나치게 소홀히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물론 그것은 여기서 논외로 하고 있기때문일 것이다.
개인주의가 널리 퍼진 우리 시대에 연극적 주문(呪文)과 불꽃놀이 없이 자기희생이 널리 퍼질 수 있을지 의문(103쪽)이라며, 서로 나누고 협력하는 행위에 담긴 자기희생은 희망없이는 불가능하다(108쪽)고 한다. ‘희망’이란 ‘운동의 기술’로서 보다는 그 자체로서 ‘인간에 대한 믿음’의 바탕이 되는 것이리라. 또한 현재와 미래, 과거를 바라보는 보수주의자, 자유주의자, 회의주의자, 급진주의자, 수구주의자들의 태도비교는 상당히 흥미롭다.(52)
“대중운동이 시작되고 전파되려면 신에 대한 믿음은 없어도 가능하지만, 악마에 대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137쪽)고 한다. 그러나 형식을 불문하고 대중운동은 그 자체로써 대부분 사람들의 ‘삶 그 자체’이므로, 그 삶이 존재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희망’를 창조해나가는 ‘자전거타기’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악마’이든, ‘신’이든 간에 계속하여 페달을 밟지 않으면 그 순간 바로 넘어지게 마련인 것처럼.
“뻔뻔한 어휘와 행동 뒤에는, 그리고 자기만 옳다는 큰소리 뒤에는 죄의식이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142쪽) 지금 현재 우리 사회의 그런 뻔뻔함 뒤에도 그러한 일말의 죄의식이라도 남아 있다면, “자신과 화해한 자만이 세계에 대한 공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126쪽)고 한 말처럼, 그나마 화해의 희망이라는 불씨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대중운동에 있어서 ‘지식인 선구자’들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열광하는 대중, 신념에 주린 대중들이 그러한 주장들에 확신을 부여하여 새로운 믿음의 근원으로 삼는다.”(204쪽)고 한다. 즉 일종의 새로운 우상을 창조하여 스스로 신을 만드는 종교화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운동을 개척하는 것은 지식인, 실현하는 것은 광신자, 굳건히 다지는 것은 행동가다.”(214쪽)라고 한다. “행동가는 대중을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인 분쟁과 광신자들의 무모함으로부터 지켜낸다.”(216쪽)고 한다. 그래서 ‘좌절한 영혼’을 은밀하게 이용하려고만 하지 않고,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 명예롭게 대함으로써 명예로운, 지도자들의 예를 들고 있다.
그리고 진정한 행동가는 신념가가 아니라 법률가이며, 행동가는 새 체제의 안정과 지속성을 꾀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절충적으로 동원하므로(218쪽), “행동가의 손에서 다듬어지는 체제는 일종의 조각보”(219쪽)라고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자본주의니, 공산주의, 사회주의라는 체제의 논쟁도 ‘자유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안식과는 무관하게, 어찌보면 잘 짜맞춰진 ‘조각보들의 색깔논쟁’에 치우친 감이 있다. ‘조각보의 색깔’이 뭐 그리 대수인가?
“격정적인 시기가 지난 운동은 성공한 자들에게는 권력의 수단이요, 좌절한 이들에게는 아편이 된다.”(221쪽)고 한다. 대중운동이 아무리 ‘정체된 사회를 각성시키고 혁신하는 요인’(237쪽)이 된다고 하더라도 이를 무기한 방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위기사회의 소통구조를 만드는 것이 운동의 왜곡을 방지하고, 그들을 치유하여 동행하게 하는 예방적 조치들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도 비록 극히 소수의 예외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좌절되지 않은, 양호한 명예로운 사람들’의 대중운동 참여 심리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지금도 진행되고 있을 모든 형식의 대중운동(삶)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 특히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일부 사람들(절박한 삶)의 일면적 심리인 ‘좌절’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참고가 된다고 본다.
“한 국가의 잠재적 역량은 갈망들의 저수지와 같다.”(236쪽)는 점과, ‘광신주의’라는 ‘영혼의 질병’이 부활이라는 ‘기적의 도구’로도 작용하는 것을 발견(241쪽)하면서, 그것이 명백하든, 명백하지 않든 간에 자신의 어떤 분노와 좌절, 그리고 ‘갈망’들이 스스로를 움직이게 하는 잠재적 동인이 되고 있음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