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일회(一期一會)(법정, 문학의 숲)
이 책은 2009년 봄 스님의 잦은 병환으로 쇠약해진 건강의 회복을 빌면서 스님의 제자 덕인, 덕현, 덕진 스님과 시인 류시화 님이 그동안의 법문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9쪽) 무소유의 ‘맑은 가난’을 강조하시며 몸소 모범을 보이신 법정(法頂)스님은 중생의 안타까움을 뒤로하고 2010년 3월 11일 오후 1시 52분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법랍 55세, 세수 78세로 입적하셨다.
일기일회(一期一會)는 ‘모든 순간은 생애 단 한번의 시간이며, 모든 만남은 생에 단 한번의 인연’을 뜻하는 말(49쪽)로서, 스님이 평소에 장소에 상관없이 일관되게 강조해 오시던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라는 말씀을 스님의 친필로써 표지를 꾸민 듯하다. “삶에서 가장 신비한 일은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 사실”(7쪽), “한 순간을 놓치지 말라. 그 순간이 생과 사의 갈림길이다.”(6쪽) “삶 자체가 되어 살아가는 곳, 그 곳이 바로 천국이다.”(15쪽)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어나기 때문에 봄을 이루는 것(17쪽)이듯이 현실의 삶이 그대로 하나의 삶의 의미를 이루는 것이라는 말씀일 것이다. 그리고 준비된 나무와 풀만이 때를 만나 꽃과 잎을 열어 보이듯이 우리들 자신은 지금 어떤 꽃을 피우고 있는지를 묻고 계신다.(18쪽) 개인들은 스스로 불성의 씨앗을 이미 갖고 있는 것이므로, 그 씨앗을 잘 보관하고 가꾸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또한 각자의 몫일 것이리라.
승가의 생명력은 청정성(21쪽)에 있음을 강조하시고, 늘 맑고 향기롭게 세상을 밝히기를 희구하셨다. 맑음은 개인의 청정과 진실을 말하는 것이고, 향기로움은 그 청정과 진실의 사회적인 영향력, 즉 메아리라고 하셨다.(21쪽) 더불어 절이 있기 전에 먼저 수행이 있었음을 말씀하신 것은 깨달음이 있은 뒤에 행이 있는 것으로 미룰 것이 아니라 바로 매일 매일의 수행의 삶 속에 깨달음이 씨앗처럼 깃들어 있으므로 바로 실행으로 옮김을 강조하신 것일 것이리라. 그 실행의 중심에 ‘맑은 가난’과 ‘자비의 나눔’(96쪽)이 있었다.
늘 우리는 과연 가진 것만큼 행복한가를 물으시면서(43쪽), 행복과 불행은 외부적인 상황이나 조건에만 있지 않고 내적인 수용, 즉 받아들이는 삶의 자세에 달려 있음(43쪽)을 강조하시고, 무지 속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안일과 방종을 경계하셨다. 아마도 자재(自在)하는 자유(自由)로움이란 늘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점검하고 참회하며 정진하는 엄격한 책임을 동반하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셨을 것이리라.
적당한 욕망이나 욕구는 삶의 탄력을 위해서 필요하지만, 지나친 탐욕은 인간을 병들게 한다(57쪽)고 하시면서, 생태계의 파괴와 교란행위, 금융경제의 위기 등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지금 당장의 과제임을 강조하신다. 수행자들이 밭을 갈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밭에 또 집착할까를 염려하기 때문(138쪽)이라는 초기 경전의 가르침을 예로 드시면서 묵혀두거나 쌓아두지 말며(178쪽), 그러한 비본질적인 것들로부터 먼저 자유로워지기를 원하시면서 간소하게 사는 것이 가장 본질적인 삶(197쪽)이라 하셨다.
부처님 오신날만 날인 것이 아니라 매일이 부처님 오시는 날이 되어야 한다(159쪽)고 하시며, 모두가 가지고 있는 깨달음의 씨앗에 꽃을 피울 것을 당부하셨다. 순간 순간 마음 쓰는 일이 곧 수행(163쪽)이므로 인간관계 속에서 그 대상을 찾아 늘 서 있는 자리(184쪽)에서 현재의 자기를 확인할 것(164쪽)을 주문하고 계신다.
한국불교에서 지혜를 우선시하고 자비를 소홀히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 지적하시면서, 지혜와 자비는 둘이 아니며 청정한 한 마음에서 나오는 같은 뿌리로서 오히려 자비심에서 지혜가 싺튼다(194쪽)고 하신다. 이는 스님께서 늘 말씀하시던 결과로서의 깨달음보다 바로 그 수행과정으로서의 실천이 더 가치로운 일임을 재삼 강조하시는 것이리라. 목표지점보다는 그 곳에 이르는 과정이 더 중요하며, 그 과정이 곧 우리들의 일상이자 순간순간의 삶이라고 하신다.(202쪽)
햇차가 나올 무렵이면 꾀꼬리가 돌아오고, 진달래가 필 무렵이면 반드시 소쩍새가 찾아오고(67쪽), 노란 좁쌀같은 마타리 꽃이 피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신선한 가을 바람이 불어 오듯이(213쪽), 세상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살아있는 모든 것은 한 뿌리에서 나누어진 가지(245쪽)이므로 사람사는 세상은 하나의 메아리라고 하셨다. 날마다 좋은 날이 되기 위해서는 그 속을 사는 우리들이 더불어 만들어 가야하는 또 하나의 과제임을 암시하신 것이리라.
인디언 영적 지도자인 ‘구르는 천둥’의 말처럼 대지가 자연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몸을 크게 뒤흔들듯이(246쪽), 사람도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이루려면 끊임없이 수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달라이라마의 말처럼 용서는 가장 큰 수행(261쪽)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는 ‘친절’이고, 친절은 자비의 구체적인 모습(271쪽)이라고 하셨다. 언제나 자비롭고 용서하며 너그러운 땅(262쪽)의 침묵을 배우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의 자유를 닮아 자기로부터 전체로의 중심이동을 권유하셨다.(361쪽)
그런 순간순간의 삶마다 우리는 늘 두 가지의 길, 즉 손을 내미는 마음과 외면하는 마음이 앞을 가로막는 선택의 시간에 마주서게 된다고 하시면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그 한 생각이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것이며, 다음의 생을 결정짓는 것이라고 하셨다. 지금 이 순간의 존재이유는 바로 지난 세월의 도움을 갚는 것(364쪽)이며, 그런 단 한번의 기회가 주어진 바로 지금 이 살아있는 순간을 늘 감사해야 해야하는 이유일 것이리라.
이젠 더 이상 예전처럼 중이 밥값은 해야 하고, 빚은 갚아야 하는 마음으로 서둘러 어두운 산길을 새벽처럼 달려오시던 법문은 없을지라도, 각자가 늘 깨어있기만 한다면 그동안의 가르침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맑고 향기로울 것이다. 스님은 그렇게 순간순간을 메마름으로 살아가는 모든 중생을 위해서 자신은 늘 가난했지만 또렷한 세상의 꽃으로 계셨기 때문이리라.